척준경 — 무력은 최강, 평가는 최악

1126 5월 · 여진 석성 · 개경

고려사를 읽다 보면 이 사람의 전투 장면에서 서술이 흔들린다. 사실을 적는 문장인데 무협지처럼 읽힌다.

혼자 성문으로 들어가다

1104년, 임간이 여진에게 크게 패했다. 고려군이 무너지는 가운데 척준경이 갑옷을 입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장을 베고 포로가 된 아군을 구해 돌아왔다.

1107년 윤관의 여진 정벌 때는 이렇다.

고려군이 여진의 석성을 공격했으나 성이 험해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윤관이 척준경을 불러 어찌하겠느냐 물었다.

그가 답했다. 제가 일찍이 장주에서 죽음을 면하고 돌아온 것은 공의 은혜입니다. 지금 죽기를 각오하고 갚겠습니다.

그리고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 성으로 올라가 적장 몇을 베었다. 그 틈에 고려군이 성으로 올라 성을 함락시켰다.

같은 정벌에서 그는 여러 번 이런 식으로 나온다. 홀로 뛰어들고, 앞장서고, 포위를 뚫는다.

동생이 죽던 날

1105년 무렵의 일로 전한다. 그의 동생 척준신이 여진에게 붙잡혀 죽었다.

고려사는 그가 그 뒤로 여진을 상대할 때 특히 격렬했다고 적었다.

궁궐을 불태우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1126년,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던 이자겸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척준경은 이자겸과 사돈 관계로 얽혀 그 편에 서 있었다.

왕의 측근들이 이자겸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자 척준경이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고려 궁궐 대부분이 이때 탔다.

왕은 사실상 이자겸의 손 안에 놓였다.

그리고 다시 뒤집다

그런데 몇 달 뒤, 인종이 척준경에게 밀지를 보냈다.

그는 그 밀지를 받고 이자겸을 잡아 유배 보냈다. 자기가 궁궐에 불을 질러가며 지켜준 사람을, 자기 손으로 끝냈다.

권력은 그에게 넘어왔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 정지상이 그를 탄핵했다. 궁궐을 불태우고 왕을 위협한 죄는 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유배되었고 1144년에 죽었다.

어떻게 볼 것인가

무력만 놓고 보면 고려사에서 그를 넘는 인물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평가는 정반대다. 고려사는 그를 좋게 적지 않았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다. 그의 전투 기록 대부분은 윤관의 여진 정벌 관련 기사에서 나온다. 그 기록은 윤관의 아들 윤언이가 아버지의 공적을 정리하는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그의 무용담이 이토록 생생하게 남은 데는 사정이 있을 수 있다. 그를 위해 적힌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공적을 돋보이게 하는 자리에서 함께 적힌 것일 수 있다는 뜻이다.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그는 나라를 위해 여러 번 목숨을 걸었고, 궁궐에 불을 질렀으며, 그 불을 질러 세운 권력을 자기 손으로 무너뜨렸다.

출처

관련 콘텐츠

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고려 지도에서 관련 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