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할아버지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앞서 본 신라의 거타지 이야기와 뼈대가 같다.
『고려사』 첫머리
『고려사』는 태조 왕건의 기록을 시작하기 전에 그 조상들의 내력을 따로 적어두었다. 고려세계라 한다.
그 내용은 고려 중기 김관의라는 사람이 지은 『편년통록』에서 가져온 것이다. 편찬자들은 그 사실을 밝히면서, 내용에 의심스러운 대목이 있다는 취지의 지적도 함께 달아두었다.
아버지를 찾아 가는 길
작제건의 어머니는 진의라는 여자였고, 아버지는 당의 황제였다고 이 기록은 적었다. 배를 타고 온 귀인이 진의와 하룻밤을 지내고 활과 화살을 남기고 떠났다는 것이다.
작제건은 자라서 아버지를 찾아 배를 타고 당으로 향했다.
바다 한가운데서 안개가 끼어 사흘이나 배가 나아가지 못했다. 뱃사람들이 점을 치더니 고려 사람 하나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했다. 작제건이 스스로 물로 뛰어들었고, 발밑에 바위가 있어 서게 되었다. 그러자 안개가 걷히고 배는 떠났다.
용왕의 부탁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나는 서해의 용왕이다. 늙은 여우 하나가 밤마다 부처의 모습으로 나타나 경을 읽는데, 그때마다 내 머리가 아프다. 그대의 활로 그를 쏘아달라.
작제건이 기다렸다가 활을 쏘았다. 늙은 여우가 떨어져 죽었다.
용왕이 고마워하며 딸을 아내로 주었다. 두 사람은 칠보와 함께 돌아왔고, 개성 일대에 자리 잡았다.
우물
용녀는 집 안에 우물을 파고 그 우물을 통해 서해의 친정을 오갔다. 다만 남편에게 자기가 드나드는 모습을 절대 보지 말라고 했다.
어느 날 작제건이 몰래 엿보았다. 용녀가 어린 딸과 함께 우물로 들어가 용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용녀가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난 아들이 용건, 곧 왕륭이고 그 아들이 왕건이다.
같은 이야기, 다른 이름
앞서 신라 편에서 본 거타지 이야기를 나란히 놓으면 이렇다.
배가 바다에서 멈춘다. 점을 쳐서 한 사람을 섬에 남긴다. 서해의 신이 나타나 늙은 여우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호소한다. 남겨진 사람이 활로 여우를 쏜다. 신이 딸을 아내로 준다.
두 이야기가 완전히 같다. 다른 것은 주인공의 이름뿐이다.
거타지 이야기는 신라 진성여왕 때의 일로 삼국유사에 실렸다. 작제건 이야기는 고려 왕실의 조상 이야기다.
둘 중 어느 쪽이 먼저인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새 왕조가 자기 시작을 꾸밀 때,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의 틀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점이다.
없던 이야기를 지어내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이미 아는 이야기에 새 이름을 넣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여기에 앞 편의 도선까지 얹으면 고려 왕실의 시작 이야기가 완성된다. 용왕의 사위인 할아버지, 예언한 승려, 그리고 태어날 것을 미리 정해진 아이.
왕조의 시작에는 언제나 이런 이야기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