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7년에 태어나 898년에 죽은 승려다. 영암 출신이고 만년에는 광양 옥룡사에 머물렀다. 여기까지는 그의 비문으로 확인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사람의 이름을 빌린 책이 그 뒤 천 년 동안 계속 쏟아졌다.
예언
『고려사』 첫머리에는 고려 왕실의 내력을 적은 부분이 있다. 거기에 도선이 등장한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송악에 집을 짓고 있을 때 도선이 지나가다 말했다. 기장을 심을 땅에 어찌 삼을 심는가.
왕륭이 쫓아가 까닭을 묻자 도선이 산세를 살펴보고 집 지을 자리와 방법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법대로 하면 내년에 반드시 슬기로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이라 하라.
이듬해 왕건이 태어났다.
또 왕건이 열일곱이 되었을 때 도선이 다시 찾아와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법, 하늘과 땅의 이치를 가르쳤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의 성격
이 이야기가 실린 『고려사』는 조선 초에 편찬됐다. 그리고 그 내용은 고려 중기 김관의라는 사람이 지은 책에서 온 것이다.
그러니까 왕건이 태어나기 전에 도선이 예언했다는 이야기는, 고려 왕조가 자리를 잡은 뒤에 정리된 것이다.
새 왕조가 자기 시작을 설명할 때 신비한 예언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흔한 방식이다. 앞서 본 작제건 이야기도 같은 책에서 나온다.
실제 도선이 왕륭을 만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연대상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만 확인해줄 자료가 없다.
도선비기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도선의 이름을 단 예언서와 풍수서가 끊임없이 나왔다. 『도선비기』, 『도선답산가』, 『송악명당기』 같은 것들이다.
이 책들은 대부분 도선이 쓴 것이 아니다. 후대에 만들어져 그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본다.
왜 그랬을까. 이름값 때문이다. 도선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그 책의 말에 권위가 생겼다.
실제로 고려에서는 도읍을 옮기자는 주장, 특정 지역을 억누르자는 주장, 절을 세우자는 주장이 모두 도선의 이름으로 나왔다. 뒤에 볼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도 이 계열의 논리 위에 있다.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도, 뒤에 정감록 같은 예언서가 돌 때도 도선의 이름이 얹혔다.
남는 것
그래서 이 사람은 이상한 위치에 있다.
실존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비문이 있고 생몰년이 있다. 그런데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글의 대부분은 그가 쓴 것이 아니다.
우리가 도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 사람이라기보다, 천 년 동안 쌓인 하나의 권위에 가깝다.
정작 그 자신이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거의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