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과 걸사비우 — 두 줄로 갈린 사서

698 · 천문령 · 동모산

고구려가 무너진 지 30년, 그 유민들이 새 나라를 세웠다. 발해다.

그런데 그 나라를 세운 사람이 누구인지를 두고 중국의 두 사서가 서로 다르게 적었고, 그 두 줄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논쟁의 뿌리가 되었다.

영주를 떠나다

고구려가 망한 뒤 당은 유민들을 여러 곳으로 흩어놓았다. 그 가운데 영주라는 곳에 고구려 유민과 말갈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당에 반기를 들었다. 그 혼란을 틈타 두 무리가 영주를 빠져나갔다.

하나는 대조영과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 이끄는 고구려계 무리였다. 다른 하나는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 무리였다.

당이 추격군을 보냈다. 이해고가 이끄는 군대가 먼저 걸사비우를 쳤고, 걸사비우는 전사했다. 걸걸중상도 이 무렵 죽은 것으로 보인다.

남은 것은 대조영이었다. 그는 두 무리를 합쳐 이끌고 계속 동쪽으로 갔다.

천문령

이해고가 계속 쫓아왔다. 대조영은 천문령에서 그를 맞아 싸워 크게 이겼다. 이해고는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추격이 끊긴 뒤 그는 동모산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웠다. 698년, 나라 이름은 진국(震國)이었다.

뒤에 당이 그를 발해군왕으로 책봉하면서 국호가 발해로 바뀐다.

두 줄

『구당서』는 대조영을 이렇게 적었다. 고려의 별종이라고.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신당서』는 다르게 적었다.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부속되어 있던 자라고.

한쪽은 고구려 사람이라 했고 한쪽은 말갈 사람이라 했다.

이 두 줄이 발해의 귀속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의 출발점이다. 한국 학계는 대체로 고구려 계승국으로 보고, 중국 학계는 말갈족이 세운 당의 지방정권으로 본다.

다만 이 논쟁에서 자주 빠지는 대목이 있다. 애초에 영주를 빠져나온 것이 두 무리였고, 그중 하나를 이끈 걸사비우는 말갈 사람이었으며, 그가 죽은 뒤 대조영이 두 무리를 합쳤다는 것이다.

발해가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함께 세운 나라였다는 사실 자체는 사서가 이미 적어놓았다.

스스로는 무엇이라 했나

발해 자신이 남긴 말이 하나 있다.

8세기 중반 발해 문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 부여의 풍속을 이었다는 취지로 밝혔다. 일본 쪽 기록에 남아 있다.

일본은 발해를 고려, 곧 고구려로 부른 기록을 여러 차례 남겼다.

중국의 두 사서가 서로 다르게 적어놓은 문제를, 정작 발해 자신은 자기 국서에 답해두었던 셈이다.

다만 발해가 남긴 자기 역사서는 전하지 않는다. 이 나라 역시 자기 목소리로 자기를 설명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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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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