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불교에서 가장 큰 이름이다. 그리고 가장 규범에서 벗어난 사람이기도 하다.
짧게 정리하면
617년에 태어났다. 승려가 되어 정해진 스승 없이 공부했고,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을 비롯해 수십 종의 저술을 남겼다. 그의 책은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가 널리 읽혔다. 신라 사람의 저술이 동아시아 불교의 표준 해설서로 쓰인 거의 유일한 사례다.
그러나 대중에게 그는 저술로 기억되지 않는다. 해골물과 요석공주로 기억된다.
해골물
의상과 함께 당으로 유학 가던 길, 밤에 무덤 사이에서 잤다. 목이 말라 어둠 속에서 물을 마셨는데 아주 달았다. 날이 밝아 보니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다. 구역질이 났다.
그 순간 깨달았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것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것이 사라진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으니 밖에서 구할 것이 없다. 그는 유학을 그만두고 돌아섰다.
이 이야기의 출처가 문제다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없다.
삼국유사는 원효에게 한 조목을 주었지만 해골물 이야기를 적지 않았다. 대신 그가 여러 번 유학을 시도했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정도로 넘어간다.
해골물 이야기가 실린 것은 중국 책이다. 송나라 찬녕이 988년에 엮은 『송고승전』의 의상전에 나온다. 그리고 그보다 앞선 중국 문헌에도 비슷한 대목이 보인다. 다만 초기 형태에서는 무덤에서 자다 귀신을 보고 깨달았다는 쪽에 가깝고, 해골에 고인 물을 마셨다는 구체적인 장면은 뒤로 갈수록 선명해진다.
그러니까 한국인이 가장 잘 아는 한국 승려의 일화가 중국 기록에서 왔고, 그 형태도 시간이 지나며 다듬어졌다.
파계
그가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겠다.
무열왕이 그 뜻을 알아채고 요석궁의 홀로 된 공주와 짝지어 주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설총이다.
계를 어긴 뒤 그는 스스로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라 자칭했다. 광대들이 쓰는 큰 박을 얻어 무애(無㝵)라 이름 붙이고, 그것을 두드리며 노래하고 춤추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삼국유사는 그 결과를 이렇게 적었다.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다고.
남는 질문
원효는 당에 가지 않았다. 그 시대 신라 승려들이 목숨을 걸고 건너가던 그 길을 그는 도중에 접었다.
그런데 그의 책은 그가 가지 않은 그 나라에서 읽혔다. 중국 승려들이 그의 주석을 인용했고, 일본에도 전해졌다.
가지 않은 사람의 글이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