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372년, 백제는 384년에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527년이다. 백 년 넘게 늦었다.
왜 늦었나
신라에는 불교가 훨씬 일찍 들어와 있었다. 눌지왕 때 묵호자라는 승려가 와서 병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고, 소지왕 때도 승려가 들어왔다. 다만 공인되지 않았다.
신라의 귀족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여섯 부의 유력 집단이 왕과 권력을 나눠 갖는 구조였고, 각자 자기 신앙과 제사를 가지고 있었다. 왕이 하나의 종교를 세운다는 것은 그 질서를 바꾸겠다는 뜻이었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려 하자 신하들이 모두 반대했다.
그 자리에 나선 사람
이차돈이 왕에게 아뢰었다. 제 목을 베어 여러 사람의 의논을 결정하십시오.
왕이 말렸으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왕의 명이라 하며 절을 세우는 일을 벌였다. 신하들이 왕에게 따지자 왕은 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다고 했고, 이차돈은 그 죄로 처형되었다.
죽기 전에 그가 말했다. 부처가 계신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
목을 베자 피가 솟았는데 그 빛이 젖처럼 희었다고 삼국유사는 적었다. 잘린 머리가 날아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고, 하늘이 어두워지며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렸다고도 했다.
사람들이 두려워했고, 그 뒤로 불교를 반대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돌에 남은 것
이 이야기의 근거는 삼국유사만이 아니다.
경주 백률사에 있던 돌기둥이 남아 있다. 이차돈 순교비, 또는 백률사 석당이라 불린다. 818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여섯 면 가운데 한 면에 순교 장면이 새겨져 있고 나머지 면에 글이 새겨져 있다.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사건으로부터 약 300년 뒤에 만들어진 것이니 당대 기록은 아니지만, 신라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했는지 보여주는 실물이다.
이름이 여럿이다
이 사람의 이름은 자료마다 다르다. 이차돈, 염촉, 거차돈 등으로 나온다. 삼국유사 자신이 여러 표기를 나란히 적어두었다.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옮기는 방식이 자료마다 달랐기 때문으로 본다. 이차 또는 염이 뜻을, 돈이나 촉이 소리를 나타낸다는 설명이 있다.
짜고 한 일이었나
오늘날 연구자들이 자주 지적하는 대목이 있다. 왕이 명을 내리지 않았다고 잡아떼고, 신하가 그 죄를 뒤집어쓰고 죽고, 그 죽음으로 반대가 무너지는 구조가 너무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을 법흥왕과 이차돈이 미리 짜고 벌인 일로 보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진다. 이차돈 자신이 왕에게 제 목을 베라고 먼저 청했다는 기록 자체가 그 방증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이것은 기적이 아니라 정치다. 다만 그 정치를 위해 스물두 살 남짓한 사람이 실제로 목이 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