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과 아직기 — 남의 나라 기록에만 있는 사람

405 · 백제 → 왜

백제 사람인데 백제 기록에는 없고 일본 기록에만 나오는 두 사람이 있다.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이다.

일본서기가 적은 것

백제 왕이 왜에 좋은 말 두 필을 보내면서 아직기를 함께 보내 기르게 했다고 『일본서기』는 적었다. 그런데 아직기가 경전을 읽을 줄 알았다. 그래서 왜의 태자가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왜왕이 아직기에게 물었다. 그대보다 나은 학자가 또 있는가. 아직기가 답했다. 왕인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뛰어납니다.

왜가 사람을 보내 청하자 이듬해 왕인이 건너왔다. 태자가 그에게 배워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적혀 있다.

『고사기』는 조금 다르게 적었다. 왕인이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천자문 문제

이 대목에 걸림돌이 있다. 천자문은 중국 남조 양나라의 주흥사가 6세기 초에 지은 책이다. 왕인이 건너갔다는 시기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잡힌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책을 가져간 셈이 된다.

이 문제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갈래다. 후대에 정리하면서 당시 널리 쓰이던 교재의 이름을 대표로 적어 넣었다는 설명, 주흥사 이전에도 비슷한 이름의 다른 천자문이 있었다는 설명, 왕인의 도래 시기 자체가 기록보다 늦다는 설명 등이 있다.

어느 쪽도 확정되지 않았다. 이 기록의 연대를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점에는 대체로 견해가 모인다.

우리 기록에는 없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삼국사기에도 삼국유사에도 왕인과 아직기의 이름이 없다.

백제가 왜에 학문과 기술을 전했다는 사실 자체는 여러 자료로 뒷받침된다. 칠지도, 백제계 유물, 일본 고대 씨족의 계보 기록 등이 그렇다. 다만 그 전달을 담당한 개인의 이름은 우리 쪽에 남지 않았다.

왕인이라는 이름 자체도 논의 대상이다. 일본에서 그의 후손이라 칭한 씨족의 이름과 연결되어 후대에 정리된 형태일 가능성이 지적된다.

지금 남아 있는 것

전라남도 영암에 왕인 유적지가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승에 따라 조성된 곳이다. 다만 이 전승이 문헌으로 확인되는 것은 조선 후기 이후이고, 유적지가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은 20세기다.

일본 오사카에는 왕인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이 있다. 이곳이 그의 무덤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 역시 에도 시대다.

두 나라 모두 그를 기린다. 그런데 두 나라 모두 그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모른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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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