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마지막 장수다. 그리고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그의 기록은 놀랄 만큼 짧다. 한 장이 채 되지 않는다.
남은 기록 전부
계백은 백제 사람이고 벼슬은 달솔에 이르렀다. 660년 신라와 당의 군대가 밀려오자 그는 결사대 5천 명을 뽑아 나섰다.
떠나면서 그가 말했다. 한 나라의 사람으로 당과 신라의 큰 군사를 맞게 되었으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까 두려우니 살아서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 것이 낫다.
그리고 가족을 모두 죽였다.
황산벌에 이르러 세 곳에 진을 치고 신라군을 맞았다. 병사들에게 말했다. 옛날 월나라 구천은 5천으로 오나라 70만을 깨뜨렸다. 오늘 마땅히 힘써 싸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네 번 싸워 네 번 이겼다. 그러나 군사가 적고 힘이 다해 마침내 패했고, 그도 죽었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계백은 이것이 전부다. 태어난 해도 가문도 그전의 이력도 없다.
이름인가 성인가
계백(階伯)이라는 표기 자체가 문제다. 백제의 대성팔족에 계씨는 없다. 그래서 계백이 성과 이름인지, 아니면 우리말 이름을 소리대로 옮긴 것인지 확정되지 않았다.
일본 기록에 나오는 백제 관련 인명과 연결짓는 견해도 있으나 근거가 충분하지는 않다. 백제 최후의 장수인데 그 이름조차 확실하지 않다.
가족을 죽였다는 대목
이 장면은 오랫동안 충절의 상징으로 읽혔다. 그러나 근래에는 다른 각도의 논의도 있다.
하나는 사실성 문제다. 이 대목이 계백 개인의 행동인지, 아니면 백제 멸망의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후대에 정리된 서술인지 가려낼 자료가 없다. 삼국사기 열전은 김부식이 여러 자료를 모아 쓴 것이고, 그 자료 자체가 대부분 신라 계열이다.
다른 하나는 해석 문제다. 같은 행동을 두고 충의 극한으로 보는 시각과, 전쟁이 사람에게 무엇을 시키는지 보여주는 장면으로 보는 시각이 갈린다. 최근 교과서와 연구서들이 이 대목을 다루는 방식도 예전과 같지 않다.
관창
황산벌 이야기에는 반드시 따라 나오는 대목이 있다. 신라의 어린 화랑 관창이 홀로 백제 진영으로 돌진했다가 사로잡혔고, 계백이 그 어린 나이를 보고 살려 돌려보냈으나 다시 돌진해 왔고, 두 번째에는 목을 베어 말에 실어 보냈다는 이야기다.
이 장면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관창 열전에 실려 있다. 그러니까 계백의 인간적인 면모를 전하는 이 이야기는 계백의 기록이 아니라 상대편의 기록에서 온 것이다.
백제 최후의 장수에 대해 우리가 아는 가장 인간적인 대목이, 그를 이긴 쪽이 적어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