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마지막 시기의 실권자다. 그리고 이 사람만큼 한국과 중국에서 정반대로 기억되는 인물도 드물다.
출생부터 이상하다
삼국사기 열전은 그가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말해 사람들을 현혹시켰다고 적었다.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건국 시조가 알에서 나오거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는 흔하다. 그러나 왕이 아닌 신하가, 그것도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했다고 기록된 경우는 드물다. 권력의 근거를 혈통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신성함에서 찾으려 한 흔적으로 읽는 시각이 있다.
성씨도 문제다. 그의 성은 연(淵)인데 중국 기록에는 천(泉)으로 나온다. 당 고조 이연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뜻이 통하는 글자로 바꿔 적은 것이다. 그래서 중국 사서만 읽으면 이 사람의 성을 알 수 없다.
642년의 밤
아버지가 죽고 그 자리를 물려받으려 하자 조정이 반대했다. 성품이 사납다는 이유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사죄하며 겨우 자리를 이었다.
그리고 영류왕과 대신들이 그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는 먼저 움직였다. 군대의 사열식을 연다며 대신들을 모두 초대해놓고 그 자리에서 백여 명을 죽였다. 그리고 궁으로 달려가 왕을 죽여 시신을 도랑에 버렸다. 왕의 조카를 새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었다.
삼국사기는 그의 차림을 이렇게 적었다. 몸에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녔고, 아무도 감히 쳐다보지 못했으며, 말에 오르내릴 때는 귀족을 엎드리게 해 그 등을 밟았다.
두 나라의 평가
당 태종은 그를 임금을 죽인 자로 규정하고 고구려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리고 두 번 다 실패했다.
중국에서는 이 사람이 소설과 연극의 악역이 되었다. 경극에도 개소문이라는 배역이 있다. 당의 명장 설인귀와 맞서다 죽는 구도로 그려진다. 실제 역사에서 그는 당의 침공을 막아내고 병으로 죽었으니 사실과는 다르다.
반대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그를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가로 평가했다. 왕을 죽였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사대를 끊고 자주로 돌아선 결단이었다는 점에 무게를 둔 것이다.
같은 사람을 두고 한쪽은 악귀로, 다른 한쪽은 혁명가로 기억한다.
남은 문제
그가 죽은 해가 언제인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666년으로 적었는데, 1923년 중국에서 발견된 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명을 근거로 665년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졌다. 아들의 무덤 돌이 아버지의 죽은 해를 고쳐 쓴 셈이다.
그가 죽자 세 아들이 갈라졌다. 맏이 남생이 동생들에게 밀려 당으로 넘어갔고, 그가 길잡이가 되어 668년 고구려는 무너졌다.
한 사람이 왕을 죽여 나라를 붙잡았고, 그 아들들이 갈라져 나라를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