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만춘 — 이름이 천 년 뒤에 생긴 사람

645 9월 · 안시성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쳤다. 요동성과 백암성이 차례로 떨어졌고, 안시성만 남았다.

당군은 88일을 공격했다. 하루에 예닐곱 번씩 쳤고, 성벽보다 높은 흙산을 쌓아 넘어 들어가려 했다. 그 흙산이 무너지자 고구려 병사들이 뛰어나와 오히려 그 산을 빼앗아 지켰다. 겨울이 다가오고 군량이 떨어지자 당 태종은 철수했다.

삼국사기는 물러나면서 당 태종이 안시성주의 굳건함을 칭찬하고 비단 백 필을 주어 임금 섬김을 격려했다고 적었다.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황제가 그 성의 주인에게 선물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그 성주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

이름이 없다

삼국사기에도, 중국의 구당서와 신당서에도, 자치통감에도 안시성주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김부식은 열전을 쓰면서 안시성주를 두고 이름이 전하지 않는 것이 애석하다는 취지로 적기까지 했다.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조선 중기다. 17세기 송준길의 문집과 윤휴의 글에 등장하고, 18세기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이 이름을 널리 퍼뜨렸다. 안시성 전투로부터 천 년이 지난 뒤다.

이 이름의 출처로 지목되는 것이 명나라 때 나온 통속소설이다. 『당서지전통속연의』 같은 연의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명이 조선 문인들에게 전해져 실제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설명이 현재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다.

다만 이 설명도 확정된 것은 아니다. 조선 문인들이 접한 다른 전승이 있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645년 당대의 기록 어디에도 이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다.

화살 이야기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역시 정사에는 없다. 당 태종은 645년 철수 후 4년 뒤인 649년에 죽었고, 사인은 병으로 기록됐다.

이 화살 이야기는 고려 후기 이색의 시에 관련 표현이 보이고, 조선 시대 문헌에서 점점 구체화된다. 이기던 상대를 물리쳤다는 사실에 그 상대가 다치기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덧붙는 과정은 세계 어느 전승에서나 흔하다.

남는 것

안시성이 88일을 버텼다는 것은 사료가 말한다. 당 태종이 그 성을 끝내 넘지 못했다는 것도 사료가 말한다. 성주가 이름 없이 그 일을 해냈다는 것도 사료가 말한다.

우리가 나중에 붙인 것은 이름 하나와 화살 하나다. 그리고 그 둘은 지금 사실보다 더 유명하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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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