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 논쟁의 절반은 글자가 아니라 종이에 관한 것이다. 이 비의 탁본은 세 갈래로 나뉜다. 첫째는 쌍구가묵본 — 글자 윤곽을 종이에 옮겨 그린 뒤 바깥을 먹으로 칠한 사본으로, 1883년 사코 가게노부가 일본에 가져간 것이 여기 해당한다. 옮겨 그리는 사람의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크다. 둘째는 석회탁본이다. 20세기 초, 탁본 수요가 늘자 현지에서 탁본을 전문으로 뜨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중 초천부·초균덕 부자는 1902년 무렵부터 비면을 고르게 만들고 글자를 선명하게 하려고 석회를 발랐다. 심지어 일부 글자를 임의로 고치기도 했다. 셋째가 석회를 바르기 전에 뜬 원석탁본이다.
이 구분을 처음 학문의 문제로 끌어올린 사람은 1959년 미즈타니 데지로였다. 그는 여러 탁본을 대조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석회 이전과 이후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전까지 일본 학계가 쌓아온 연구의 토대를 흔드는 문제 제기였다.
1972년, 재일 사학자 이진희가 《광개토왕릉비의 연구》에서 훨씬 더 나아갔다. 사코가 가져온 쌍구가묵본 자체가 조작된 것이며,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그것을 은폐하려고 비면에 석회를 발라 내도해파(來渡海破) 부분을 고쳤다는 이른바 석회도포설이다. 파장은 컸다. 일본 학계 일부는 근대 일본 역사학의 체질을 반성했고, 임나일본부설을 스스로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이때부터 비문에 대한 정밀한 연구가 본격화됐다.
그런데 그다음이 중요하다. 1984년 중국의 왕건군이 장기간의 현지 실측을 토대로 《호태왕비연구》를 내면서, 잘못 읽힌 글자를 바로잡고 총 글자 수를 1,775자로 확정했다. 그는 비문의 왜를 일본 열도 북규슈의 해적 집단으로 보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한편, 이진희의 석회조작설 역시 비판했다. 이후 원석탁본을 확보해 비교하는 연구가 이어지면서, 일본군이 비문의 글자를 의도적으로 변조했다는 주장은 입증되지 않았다는 쪽으로 학계의 무게가 옮겨갔다. 석회는 참모본부의 공작이라기보다 탁본을 잘 뜨려던 현지 업자들의 손길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글자가 훼손되고 임의로 고쳐진 것은 사실이며, 개별 글자의 판독은 지금도 논쟁 중이다.
이 결론은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 왜곡은 돌에 있지 않았다. 왜곡은 읽는 방식에 있었고, 그 독법을 국가의 팽창 논리에 동원한 데 있었다. 위조를 밝히는 일보다 어려운 것은, 진짜 사료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읽혔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어려운 쪽이 이 비석의 진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