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편을 왔다. 처음에 던진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 손으로 쓴 가장 오래된 역사책은 1145년에 나왔는데 그 책이 다루는 시대는 기원전이다. 그 천 년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이 남의 기록이다. 그러면 남이 자기 필요에 따라 적은 기록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제 답을 정리할 수 있다. 몇 가지로 나뉜다.
첫째, 이것이 어떤 종류의 문서인지부터 가린다.
같은 사서 안에서도 문장의 출신이 다르다. 군대가 지나가며 본 것이 있고, 사신이 전한 말이 있고, 우리 쪽이 보낸 문서가 있고, 앞선 책에서 옮긴 것이 있다. 삼국지 동이전의 정보 상당 부분은 위나라 군대의 견문에서 왔고, 남조 사서는 찾아온 사신의 말에 기댔으며, 위서에 실린 개로왕의 표문은 백제 사람이 쓴 설득 문서였다.
출신이 다르면 무게가 다르다. 한 편 안의 모든 문장을 같은 무게로 읽는 것이 첫 번째 실수다.
둘째, 서식을 알고 읽는다.
위치, 규모, 풍속, 관제, 물산. 이 순서는 실무의 질문 순서였고, 그래서 칸에 없는 것은 적히지 않았다. 자칭도 언어도 신화도 여성도 아래쪽 사람들의 하루도 그 목록에 없다.
칸을 알면 두 가지가 보인다. 빠진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칸에서 삐져나온 문장이 어느 것인지. 걸음이 다 뛰는 것 같다, 술을 잘 빚는다, 성책이 모두 둥글다, 통역하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낮은 소리로 말한다. 이런 문장들이 서식이 시키지 않은 말이라 본 사람의 눈이 남아 있다.
셋째, 계통을 센다.
여러 사서에 같은 문장이 나온다고 여러 번 확인된 것이 아니다. 후한서는 삼국지를 바탕에 놓았고, 남사와 북사는 앞선 사서들의 재편집본이며, 삼국사기도 중국 사서를 참고했다. 사료의 개수가 아니라 계통의 개수를 세야 한다.
넷째, 견줌과 판단을 갈라낸다.
흉노와 같은 풍속이다,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 꿇어 절하는 예가 없다, 성질이 사납고 노략질을 좋아한다. 이런 문장은 그 사회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기록자의 자리에 대한 정보다. 칭찬도 마찬가지다. 부드럽고 순하다는 말 다음에 그래서 다스리기 쉽다는 말이 온다.
다섯째, 같은 자를 우리 쪽에도 댄다.
이것이 이 시리즈에서 가장 여러 번 반복한 말이다. 개로왕의 표문도 설득 문서이고 광개토왕비도 현창 문서다. 우리에게 유리한 서술이 여러 사서에 반복될 때도 계통을 세야 하고,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을 근거로 쓰려면 출처를 대야 한다. 불리한 기록에만 사료 비판을 하고 유리한 기록은 그대로 받으면, 우리가 비판하는 그 방식으로 우리도 논증하게 된다.
여섯째, 문장으로 안 되는 자리를 안다.
낙랑군의 위치를 문헌만으로 다투면 끝이 나지 않는다. 거리 표기는 실측이 아니고, 지리 서술은 잘 베껴지며, 행정 이름은 옮겨 심어지기 때문이다. 결론을 낸 것은 봉니와 목간과 무덤이었다. 문장이 너무 많고 서로 어긋날 때는 문장 밖으로 나가야 한다.
여기까지가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태도에 대해 한마디 남긴다.
이 시리즈를 시작할 때 동이는 남이 만든 칸이라고 했다. 그 칸의 이름도 범위도 그 안에 누구를 넣을지도 중국의 사정에 따라 정해졌고, 우리가 우리를 그렇게 부른 적은 없다.
그런데 그 칸 안에 3세기 부여 사람들이 입던 흰 베옷이 있고, 고구려 마을의 저녁에 남녀가 모여 부르던 노래가 있고, 집집마다 있던 부경이라는 작은 창고가 있고, 신라 사람들이 입으로 부르던 관등 이름이 있다. 걷는 것이 뛰는 것 같았다는 그 문장도 있다.
남이 만든 칸에 담긴 내 물건을 꺼내 쓰되, 칸 자체를 내 것으로 착각하지 않는 것. 이 시리즈가 하려던 일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 태도는 남의 기록에만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 것이라고 부르는 기록에도 그대로 쓴다.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해 썼는지, 무엇을 적고 무엇을 뺐는지, 그 문장이 어디서 왔는지. 이 질문들 앞에서 내 편과 남의 편은 없다.
기록을 믿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를 알고 믿자는 이야기다. 그것이 오래가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