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은 어디 있었나 — 사료만으로는 왜 결론이 안 나는가

108 · 대동강 유역 · 요서

낙랑군이 어디 있었는가. 이 물음만큼 오래 다툰 자리도 드물다.

먼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이 편은 그 논쟁의 결론을 내는 자리가 아니다. 결론은 자료실의 세계사 「한·당 제국」 편에 이미 적혀 있다. 학계의 통설은 낙랑군의 중심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것이고, 근거는 문헌만이 아니라 평양 일대에서 나온 무덤과 부장품, 관인을 찍은 봉니, 호구를 적은 목간이다. 그리고 아틀라스에는 원칙이 하나 있다. 확정된 사실의 부정에는 중립하지 않는다. 일본의 역사 부정 앞에서 그 원칙을 세웠다면 우리 쪽에서 나온 주장이라고 다르게 적용할 수 없다.

그러니 이 편이 맡을 것은 다른 것이다. 왜 문헌 사료만으로는 이 논쟁이 끝나지 않는가.

이 시리즈가 스물다섯 편을 오는 동안 만든 도구를 여기에 대 보면 이유가 보인다.

첫째, 중국 사서는 위치를 좌표로 적지 않는다.

19편에서 본 서식의 첫 칸이 위치인데, 그 칸을 채우는 방식은 늘 같다. 어디에서 몇 리, 남으로 무엇 동으로 무엇. 부여는 현도에서 천 리,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 리, 한은 사방 사천 리. 이 숫자들은 실측이 아니라 대략의 관용 표현에 가깝다.

기준점도 흔들린다. 현도에서 천 리라고 할 때 그 현도가 어디였는지가 또 논쟁거리다. 기준이 움직이면 거리도 움직인다.

둘째, 지리 기술은 특히 잘 베껴진다.

20편에서 본 그대로다. 앞선 책의 위치 서술이 뒤의 책으로 그대로 옮겨진다. 그런데 옮겨지는 동안 현실은 바뀐다. 군현은 폐지되기도 하고 서쪽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그러면 옮겨 적은 문장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배치를 설명하게 된다.

셋째, 이름이 옮겨 다닌다.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백성이 대거 이동하면 원래 살던 곳의 행정 이름을 새로 정착한 자리에 그대로 붙이는 일이 흔했다. 이름만 옮겨 심는 것이다. 낙랑과 대방도 그런 방식으로 요서 쪽에 다시 놓였다고 본다.

그러면 문헌 속에서 같은 이름이 두 곳을 가리키게 된다. 어느 시점의 기록인지를 가리지 않고 이름만 따라가면,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는 문장과 대동강에 있었다는 문장이 나란히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 가지가 겹치면 문헌만으로는 결론이 안 난다. 그리고 양쪽 모두 자기에게 맞는 문장을 골라 댈 수 있다. 논쟁이 오래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결론을 냈는가. 문헌이 아니었다.

땅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봉니는 그 자리에서 문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뜻이고, 호구를 적은 목간은 그 자리에서 사람을 세었다는 뜻이며, 무덤은 그 자리에 사람이 살고 죽었다는 뜻이다. 문장은 옮겨 적을 수 있지만 봉니와 목간은 옮겨 적을 수 없다.

이 편이 이 시리즈에서 하는 일이 그것이다. 중국 사서가 못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 21편에서 빈칸이 다른 자료가 일할 자리를 알려 준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빈칸이 아니라 넘치는 문장이 그 자리를 알려 준다. 문장이 너무 많고 서로 어긋날 때는 문장 밖으로 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균형을 위해 한 가지를 덧붙인다. 이것도 세계사 편에 이미 적혀 있는 말이다.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것과, 그것이 한반도의 역사를 규정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군현은 서북부의 일부였고 그 바깥에서 고구려와 부여와 삼한이 각자의 나라를 만들어 갔다. 그리고 군현은 지배의 통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교역과 문물의 통로이기도 했다.

위치를 인정하는 것이 곧 식민사학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둘을 붙여 놓는 순간 논쟁은 사실 다툼이 아니라 자존심 다툼이 된다.

사료 읽는 법. 문헌이 서로 어긋날 때는 어느 문장이 더 그럴듯한지를 겨루기 전에, 그 문장들이 같은 시점의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문장으로 안 되는 자리에서는 문장이 아닌 것을 찾아야 한다.

출처

관련 콘텐츠

이 글은 중국은 우리를 어떻게 적었나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고대 지도에서 관련 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