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서가 관제를 꼼꼼히 적는 데는 실용적인 이유가 있다. 사신이 오면 누구를 상대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벼슬을 내려 줄 때 어느 등급에 맞출지 정해야 했다. 그래서 이 항목은 짐작으로 채울 수 없었다.
덕분에 우리는 3세기 관직 이름들을 꽤 여럿 건졌다.
부여부터 보자. 나라에 임금이 있고 관직 이름을 모두 여섯 가축에서 따서, 마가·우가·저가·구가와 대사·대사자·사자가 있다(皆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豬加·狗加).
말, 소, 돼지, 개. 가축 이름이 벼슬 이름이 됐다. 목축이 그 사회의 바탕이었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하고, 원래 부족이나 집단의 이름이 관직으로 굳은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이 이어진다. 여러 가가 사방의 길을 나누어 다스리는데, 큰 자는 수천 가를 맡고 작은 자는 수백 가를 맡는다(諸加別主四出道, 大者主數千家, 小者數百家).
왕이 있지만 여러 가가 각자 구역을 나눠 맡는 구조다. 왕 아래로 일사불란한 조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고구려도 비슷하다. 그 나라에 왕이 있고 관직으로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부·우태·사자·선인이 있으며 높고 낮음에 각각 등급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나온다. 감옥이 없고, 죄가 있으면 여러 가가 의논하여 죽이며 처자를 몰수해 노비로 삼는다.
여러 가가 의논한다. 왕이 혼자 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국가 형태를 논할 때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다.
같은 조에는 왕실이 바뀐 이야기까지 적혀 있다. 본래 다섯 부족이 있어 연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라 하는데, 본래 연노부가 왕이었으나 점점 약해져 지금은 계루부가 대신한다.
남의 나라 왕실이 어느 집안에서 어느 집안으로 넘어갔는지를 중국 사서가 적어 둔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이 대목을 확인하려 하면 잘 맞지 않아서, 초기 고구려 왕계를 다룰 때 늘 논쟁이 되는 자리다.
신분 쪽 기록도 남아 있다.
부여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읍락에 호민이 있고, 하호라 불리는 이들은 모두 노복이 된다(邑落有豪民, 名下戶皆爲奴僕).
고구려에는 앞 편에서 본 문장이 있다. 나라 안의 큰 집들은 농사를 짓지 않아 앉아서 먹는 이가 만여 명이고, 하호가 먼 데서 쌀과 곡식과 물고기와 소금을 져다 대어 준다.
호민과 하호. 이 두 말이 3세기 이 지역의 사회 구조를 논하는 거의 모든 글에 나온다. 다만 하호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노예에 가까운지 예속 농민에 가까운지는 지금도 견해가 갈린다. 원문은 부여 조에서 노복이 된다고 했고 고구려 조에서는 짐을 져 나른다고 했다. 두 문장이 같은 것을 말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남쪽은 그림이 또 다르다. 삼국지 한 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국읍에 주수가 있지만 읍락이 뒤섞여 살아 서로 잘 제어하지 못한다. 꿇어 절하는 예가 없다(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無跪拜之禮).
이 문장은 두 겹으로 읽어야 한다. 앞부분은 관찰이다. 중앙의 통제가 느슨하고 여러 집단이 섞여 있었다는 것. 뒷부분은 판단이다. 꿇어 절하는 예가 없다는 말은 중국의 예법을 자로 놓고 잰 결과다.
여기서 앞서 부여 조에 나온 다른 문장이 떠오른다. 음식을 먹을 때는 조두를 쓰고, 모여서는 절하고 잔을 씻고 서로 읍하며 오르내린다. 같은 기록자가 부여에 대해서는 예를 갖췄다고 적고 한에 대해서는 예가 없다고 적었다. 무엇을 기준으로 갈랐는지가 이 시리즈 3부의 주제다.
마지막으로 시대를 훌쩍 건너뛴 기록 하나. 양서 신라전에는 신라의 관등 이름들이 한자로 적혀 있다. 자분한지, 제한지, 알한지, 일고지 같은 것들이다.
이 이름들은 뜻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소리를 옮긴 것으로 본다. 그러니까 6세기 신라 사람들이 실제로 입으로 불렀던 말이 여기 화석처럼 남아 있는 셈이다. 우리 옛말의 흔적을 중국 사서에서 건지는 일이 가능한 자리 가운데 하나다.
사료 읽는 법. 관제 기록에는 두 종류가 섞여 있다. 하나는 그쪽에서 쓰던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옮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록자가 자기 제도에 맞춰 등급을 매기고 정리한 것이다. 앞의 것은 그 사회의 자료가 되고, 뒤의 것은 기록자의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