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중국 혁명 — 1911에서 1989까지, 끝나지 않은 78년

1949 · 중국 베이징 천안문

**무엇이 일어났나.** 이 편은 1949년 한 해로 끊지 않는다. 중국의 혁명은 단일 사건이 아니라 78년에 걸친 하나의 줄기이며, 그 줄기가 한반도의 운명과 세 번 직접 교차하기 때문이다.\n\n**1911.** 신해혁명이 황제를 없앴으나 공화국을 세우지 못했다. 군벌 분열이 이어진다.\n\n**1919.** 5·4운동. 파리강화회의에서 산둥의 이권이 일본에 넘어간 데 항의해 학생들이 천안문 앞에 모였다. 그해 3월 조선의 만세 시위가 일어난 지 두 달 뒤였고, 당시 중국 지식인들의 글에 3·1운동이 자극으로 언급된다. 영향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았다는 드문 사례다.\n\n**1921~1949.** 공산당 창당, 국공합작과 결렬, 대장정, 항일전쟁 중의 2차 합작, 그리고 내전.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천안문 위에서 건국을 선포한다. 신해혁명이 남긴 과제를 38년 뒤 전혀 다른 세력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처리한 것이다.\n\n**1966~1976.** 문화대혁명. 혁명이 세운 체제가 스스로를 다시 뒤엎겠다며 10년간 사회를 파괴했다. 1976년 저우언라이 추모 집회가 천안문에서 시위로 번져 진압된다(4·5 천안문 사건). 그해 마오가 죽는다.\n\n**1978.**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경제는 열고 정치는 닫는 노선이었다.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과 관료 부패가 따라왔다.\n\n**1989.** 4월 개혁파였다가 실각한 후야오방이 죽자 추모 인파가 천안문에 모였고, 시위로 번졌다. 1976년과 똑같은 구조다 — 집회의 자유가 없는 사회에서 추모는 합법적으로 모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고, 그래서 장례가 반복해서 정치가 되었다. 학생들의 요구는 체제 전복이 아니라 부패 척결과 언론 자유였다. 6월 4일 군이 투입되어 진압되었고, 사망자 수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다.\n\n체제를 세운 광장이 체제에 항의하는 광장이 된 것이다. 다만 1989년의 인과는 1949년보다 1978년에서 온다 — 개혁개방이 만든 모순이 직접 원인이었다.\n\n**그때 한반도는 — 세 번의 교차.**\n\n첫째, 1949년.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선 이듬해였고, 중국 내전에서 싸운 조선인 부대 상당수가 북한군으로 편입된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에 중국이 참전하면서 전선이 고착되었다. 중국 혁명의 성공이 없었다면 한반도의 분단선이 지금 자리에 있었을지는 다르게 물어야 한다.\n\n둘째, 1966~76년.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냉각되었고, 남한에서는 그 혼란이 반공 교육의 재료로 쓰였다.\n\n셋째, 1989년. 서울은 이미 2년 전에 6월 민주항쟁으로 직선제를 얻어냈다. 같은 요구가 서울에서는 관철되고 베이징에서는 진압된 것이다. 그리고 이 대비가 다음 편의 주제가 된다.\n\n**세계사적으로는**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사는 나라의 체제가 정해졌고, 냉전의 아시아 전선이 여기서 그어졌다. 1989년의 선택 — 경제는 열고 정치는 닫는다 — 은 이후 30여 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통치 모델의 하나가 된다.\n\n혁명은 언제 끝나는가. 1911년인가, 1949년인가, 아니면 1989년 광장에서 아직 끝나지 않았는가?

관련 콘텐츠

이 글은 혁명, 그때 우리는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지도에서 관련 사건 보기

세계지도 루트에서 이 장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