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러시아 혁명 — 2년 뒤 만세 소리

1917 · 러시아 페트로그라드

**무엇이 일어났나.** 세계대전의 패배와 굶주림 속에서 1917년 2월 혁명이 황제를 끌어내렸다. 10월에는 레닌의 볼셰비키가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는다.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를 표방한 정권이었다.\n\n**그때 한반도는.** 강점 7년째였다. 같은 해 상하이에서 대동단결선언이 나왔고, 2년 뒤 3·1운동이 일어난다.\n\n**도착하기까지 — 2년.** 이 편에서 시차가 사실상 사라진다. 경로는 셋이었다.\n\n첫째, 민족자결 담론이다. 볼셰비키 정권은 집권 직후 제정 러시아가 맺은 비밀조약들을 공개하고 식민지 민족의 자결권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윌슨의 14개조가 나온 것은 그 몇 달 뒤다. 두 선언이 겹치면서 「지금이 기회다」라는 판단이 확산되었고, 이것이 3·1운동 준비의 국제적 배경이 된다. 다만 실제로 두 선언 모두 패전국의 식민지를 주로 겨냥한 것이었고,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은 대상이 아니었다.\n\n둘째, 지리적 인접이다. 연해주에는 이미 한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 등이 한인사회당을 결성하는데, 이는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으로 꼽힌다. 혁명 이듬해다.\n\n셋째, 실질적 지원이다. 1920년대 초 소비에트 정부가 상하이 임시정부와 접촉해 자금을 지원했고, 그 자금의 처리를 둘러싼 갈등이 독립운동 진영 분열의 한 계기가 된다.\n\n**남은 것.** 이 도착은 독립운동의 좌우 분화를 낳았다. 이후 무장투쟁·외교론·실력양성론에 더해 계급 문제가 축으로 들어왔고, 1920~30년대 국내 사회주의 운동과 만주의 무장 세력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 분화는 해방 이후로 이어져 분단의 사상적 전사가 된다.\n\n연해주 한인 사회의 뒷이야기도 적어 둘 필요가 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한인 무장 부대들이 충돌했고, 1937년에는 그곳에 살던 한인 17만여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혁명을 가장 가까이서 맞았던 공동체가 그 체제에 의해 흩어진 것이다.\n\n**세계사적으로는** 이후 70년 세계사의 축이 이 도시에서 그어졌다. 그리고 식민지 해방운동에 사회주의라는 언어를 공급했다 — 20세기 아시아·아프리카의 독립운동 상당수가 이 언어를 썼다.\n\n같은 해 페트로그라드와 상하이에서 각각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취지의 선언이 나왔다. 두 선언은 서로를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해방의 언어를 빌려준 체제가 그 언어를 가장 열심히 배운 사람들을 흩어 버렸다면, 우리는 그 빚을 어떻게 계산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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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혁명, 그때 우리는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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