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메이지 유신 — 혁명이라 부르지 않는 혁명, 8년 뒤 강화도

1868 · 일본 도쿄

**무엇이 일어났나.** 1868년 일본에서 260여 년의 막부 체제가 끝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 정부가 들어섰다. 주도한 것은 농민이나 도시 민중이 아니라 사쓰마·조슈 등 서남부 번의 하급 무사들이었다.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지배층 내부의 주변부가 일으킨 변혁이었다.\n\n그런데 결과는 혁명적이었다. 번을 폐지하고 중앙집권 체제로 바꿨으며(폐번치현), 무사 계급의 특권을 없애고 세습 신분제를 해체했다. 자기 계급의 기반을 자기 손으로 없앤 것이다. 이어 징병제·의무교육·근대적 조세제도가 도입되었고, 1889년 헌법이 제정되었다. 다만 그 헌법이 참고한 것은 영국형이 아니라 프로이센형이었다 — 의회를 두되 주권은 천황에게 있는 형태였다.\n\n그래서 이것을 혁명이라 부를지는 지금도 갈린다. 「유신」이라는 이름 자체가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옛것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왕정 복고의 형식을 빌린 근대화였다.\n\n**그때 한반도는.**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했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를 겪으며 척화의 방침이 굳어진다. 서원을 정리하고 세도 가문을 눌러 왕권을 회복하려 했으나, 방향은 개방이 아니라 차단이었다.\n\n같은 시기 두 나라가 같은 압력 앞에서 정반대를 택했다. 일본은 문을 열고 체제를 바꿨고, 조선은 문을 닫고 체제를 지켰다. 다만 이 대비를 조선의 실패로만 읽는 것은 사후적이다 — 당시 개방한 나라들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는 청의 사례가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n\n**도착하기까지 — 8년.** 이 시리즈에서 가장 짧은 시차이자 가장 폭력적인 도착이다. 1875년 운요호 사건, 1876년 강화도조약. 일본이 서양에 당한 방식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했다. 불평등조약의 구조까지 같았다.\n\n이후 도착은 계속된다. 1880년대 개화파가 참조한 모델이 메이지였고, 갑신정변의 구상도 그 계열이었다. 「자유」「민권」「사회」「경제」 같은 말이 일본어 번역어로 들어왔다. 앞선 여섯 편의 혁명 사상 대부분이 일본이라는 필터를 거쳐 도착한 것이다.\n\n그리고 같은 흐름의 끝에 1910년이 있다. 메이지 유신은 근대화의 모델이자 식민 지배의 동력이었다 — 우리에게 이 사건은 그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진다.\n\n**세계사적으로는** 비서구 국가가 서구의 제도를 받아들여 스스로 제국이 된 첫 사례였다. 이 선례는 아시아 각지에서 다르게 읽혔다. 근대화의 증거로 본 이들이 있었고, 30여 년 뒤 러일전쟁의 결과를 식민지 해방의 가능성으로 읽은 이들도 있었다. 둘 다 틀린 독해였다는 것은 나중에야 드러난다.\n\n아래로부터가 아니어도 혁명일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변혁이 이웃 나라에게는 재앙으로 도착할 때,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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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혁명, 그때 우리는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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