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일어났나.** 파리가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선언했을 때, 그 선언을 쓴 나라의 식민지 생도맹그에서는 50만 명 가까운 사람이 노예로 설탕을 만들고 있었다. 프랑스 무역의 큰 몫이 그곳에서 나왔다. 파리의 의회는 선언이 식민지에 적용되는지를 두고 오래 다투었다.\n\n답을 낸 것은 파리가 아니었다. 1791년 노예들이 봉기했다. 이들은 프랑스군을 물리쳤고, 이어 들어온 영국군과 스페인군도 물리쳤으며, 나폴레옹이 노예제를 되돌리려 보낸 대규모 원정군까지 물리쳤다. 1804년 아이티라는 이름의 독립국이 선포된다. 노예 반란이 국가 수립까지 이른 세계 유일의 사례다.\n\n대가는 길게 이어졌다. 1825년 프랑스는 군함을 보내 독립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고, 아이티는 그것을 갚느라 100년 넘게 국고를 소진했다. 노예였던 사람들이 자신을 소유했던 자들에게 자유의 값을 치른 것이다.\n\n**그때 한반도는.** 조선은 순조 초년이었다. 1801년 공노비 혁파로 관청에 소속된 노비 6만여 명의 문서가 불태워졌다. 우연히도 아이티 독립 3년 전이다.\n\n두 사건을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분명하다. 한쪽은 노예가 스스로 봉기해 나라를 세웠고, 다른 쪽은 왕이 위에서 문서를 태웠다. 그리고 조선의 조치는 공노비에 한정되었다 — 사노비는 그대로였고 노비제 자체가 법적으로 폐지되는 것은 1894년 갑오개혁을 기다려야 했다. 위로부터의 해방은 대개 여기까지 간다.\n\n**도착하기까지 — 오지 않았다.** 이 편이 시리즈에서 특별한 이유다. 아이티 혁명은 조선에 도착하지 않았다. 19세기 조선의 어떤 문헌에서도 이 사건에 관한 의미 있는 기록을 찾기 어렵고, 20세기 독립운동가들의 글에도 참조되지 않는다.\n\n그런데 이건 조선만의 일이 아니었다. 유럽과 미국의 역사 서술에서도 아이티는 오랫동안 지워져 있었다. 노예제를 유지하던 나라들에게 이 사건은 성공 사례가 아니라 위험한 전례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60년 가까이 아이티를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n\n그래서 이 편의 질문은 도착의 경로가 아니라 도착의 차단에 관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세계사 교과서의 한 장이고 아이티 혁명은 각주에 가깝다. 두 사건은 같은 선언에서 나왔고, 오히려 아이티 쪽이 그 선언을 문자 그대로 실현했는데도 그렇다.\n\n**세계사적으로는** 이 혁명이 근대 인권 선언의 시험대였다. 선언에 적힌 「인간」에 누가 포함되는지를 물은 것이 배제된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한번 글로 적힌 원리는 적은 사람의 통제를 벗어난다 — 이후 두 세기 동안 여성 참정권 운동과 식민지 독립운동이 반복해서 그 문장으로 돌아온 이유다.\n\n무엇이 어떤 혁명을 기억되게 하고 어떤 혁명을 지우는가? 우리가 배운 세계사에서 빠져 있는 사건들은, 누가 무슨 이유로 빼놓은 것일까?
⑤ 아이티 혁명 — 끝내 오지 않은 소식
이 글은 혁명, 그때 우리는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