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 문반 가문의 아들이 바다에서 이겼다

1592 7월 8일 · 한산도 앞바다

앞의 두 사람과 조건이 정반대다. 을지문덕은 기록이 없어서 문제였고, 강감찬은 기록이 있어도 우리가 아는 모습과 어긋나서 문제였다. 이순신은 기록이 너무 많다.

7년치 일기가 남았다. 조정에 올린 장계가 남았다. 한시와 시조가 남았다. 조카가 쓴 행록이 있고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 그를 다르게 적었으며, 유성룡의 『징비록』이 또 다르게 적었다. 이렇게 많은 기록을 남긴 전근대 무장은 드물다.

그런데 기록이 많다고 오해가 적은 것은 아니다.

**문반 가문이었다**

1545년 한성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덕수 이씨 집안은 대대로 문반이었다. 5대조 이변은 성균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는 병조참의로 세자의 스승 노릇을 했다.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이 집안에서 나온 무과 급제자가 267명인데, 그 흐름이 바뀐 기점이 바로 이순신이다. 그 이전까지는 글을 하는 집안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글을 배웠다. 무예를 시작한 것은 스무 살을 넘긴 뒤였고, 스물여덟에 처음 응시한 무과 별시에서는 말에서 떨어져 낙방했다. 급제한 것은 서른둘이던 1576년, 식년무과 병과였다. 장원이 아니라 병과다. 강감찬이 문과 갑과 장원으로 시작한 것과 대조된다.

**현감을 지냈다**

무과 급제자였지만 그가 거친 자리에는 문관직이 섞여 있다. 1586년 사복시 주부를 지냈고, 1589년 12월에는 정읍현감으로 부임해 1년 남짓 고을을 다스렸다. 공석이던 태인현감도 겸했다.

현감은 지방 행정관이다. 세금을 걷고 송사를 판결하고 굶는 백성을 먹이는 자리다. 전라좌수사가 되기 직전까지 그가 하던 일이 그것이었다.

이 경력은 나중에 그대로 쓰인다. 통제영을 한산도에 두고 4년을 버틸 때 그가 한 일은 둔전을 일구고 소금을 굽고 장부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전쟁은 싸우는 시간보다 먹이는 시간이 길다. 행정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했다.

**늦었다는 오해**

서른둘 급제를 두고 늦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조선의 무과 급제 평균 연령을 보면 오히려 이른 편이다. 늦은 것은 급제가 아니라 승진이었다.

급제 후 15년 동안 그는 함경도 국경의 종9품 권관에서 시작해 만호와 현감을 오갔다. 상관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해 미움을 샀고, 병조판서가 서녀를 첩으로 주려 하자 거절했으며, 병조판서가 화살통을 달라고 하자 그것도 거절했다. 그때 기준으로는 처세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녹둔도에서는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가 거부당한 상태에서 여진의 침입을 받았고, 그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했다. 전쟁이 나기 1년 전인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가 된 것은 종6품 현감에서 정3품으로 뛰는 파격이었다. 조정에서 반대가 있었다.

**이긴 방식**

한산도에서 그가 한 일을 순서대로 보면 이렇다. 목동에게서 적의 위치를 들었고, 견내량이 싸울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배 몇 척으로 도발했다가 물러섰고, 넓은 바다에 이르러 돌아섰다.

앞의 두 사람과 같다. 을지문덕은 하루에 일곱 번 지면서 적을 평양까지 데려왔고, 강감찬은 개경 앞 들을 비워 적이 돌아서게 만들었다. 셋 다 정면으로 부수지 않았다. 적이 스스로 약해질 자리, 혹은 이쪽이 강해지는 자리로 옮겨놓은 뒤에 잡았다.

학익진도 그렇게 읽어야 한다.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이라는 설명은 그림일 뿐이다. 그 대형이 하는 일은 흩어진 화력을 한 점에 모으는 것이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 수군이 배에 올라 칼로 싸우는 대신 총통으로 배를 부수는 방식으로 싸웠기 때문이며, 판옥선이 제자리에서 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술은 무기와 배와 사람의 방식 위에서만 성립한다.

**글의 사람**

그가 남긴 것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마 이 시조일 것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긴 사람의 노래가 아니다. 이기고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의 노래다.

『난중일기』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전황보다 사소한 것이 더 많다. 날씨, 몸이 아픈 날, 어머니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 부하의 이름, 잠을 못 잔 밤. 영웅의 기록이 아니라 견디는 사람의 기록이다.

을지문덕은 넉 줄의 한시를 남겼다. 강감찬은 과거에 장원한 문관이었다. 이순신은 문반 가문에서 태어나 현감을 지내고 7년치 일기를 남겼다. 세 번의 대첩을 이끈 세 사람이 모두 글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우연일까.

어쩌면 우연이 아니다. 이들이 이긴 방식은 힘으로 부수는 것이 아니라 판을 읽고 자리를 고르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칼의 능력이 아니라 문서와 판단의 능력에 가깝다.

**그 뒤**

한산도의 승리로부터 5년 뒤, 그는 모함으로 옥에 갇혔다. 고문을 받고 풀려나 백의종군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보러 오다 배 위에서 죽었다. 통제영이 무너지고 함대가 궤멸한 뒤에야 그는 다시 불려 나왔고, 남은 배는 열두 척이었다.

1598년 노량에서 죽었다. 쉰넷이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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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 번의 대첩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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