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때 조정에서 이런 말이 오갔다고 한다. 칼 쓰는 법은 천하에 다 있지만 일본이 가장 낫다. 그러니 그 법을 배워 와야 한다.
그 일을 맡은 사람이 훈련도감의 군교 김체건이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적의 칼」을 제대로 배워 온 사람이다.
어떻게 배웠나 — 두 가지 이야기
그가 일본 검술을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는 두 갈래로 전한다.
하나는 사신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배웠다는 이야기다. 『무예도보통지』의 왜검 항목은 그가 숙종 때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가 검보를 얻고 칼 쓰는 법을 배워 왔다고 적는다. 사도세자의 글에도, 영조 때 승정원일기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다만 그때 일본에 간 통신사의 명단에서 그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부산의 왜관에 몰래 들어가 배웠다는 이야기다. 뒷날 쓰인 「김광택전」은 이렇게 적는다.
「왜인이 비밀로 하여 배울 수가 없었다. 체건이 스스로 그 법을 얻기를 원하여, 마침내 왜관에 몰래 들어가 품팔이 일꾼이 되었다.」
왜관은 조선이 부산에 두었던 일본인 거주 구역이다. 지금의 용두산 공원 자리에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일꾼 노릇을 하며 일본인들이 칼을 익히는 모습을 몰래 보고 배웠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아직 가려지지 않았다. 둘 다 있었을 수도 있다.
재 위의 칼춤
돌아온 김체건은 임금 앞에서 칼을 시범했다. 「김광택전」은 그 장면을 이렇게 전한다.
「땅에 재를 뿌리고, 맨발로 두 엄지발가락만 재에 대고서 나는 듯이 칼춤을 추었다. 춤이 끝났는데 재에 발자국이 없었다. 그 몸의 가벼움이 이와 같았다.」
임금은 기특히 여겨 그를 훈련도감의 교련관으로 삼았다. 「김광택전」은 이렇게 덧붙인다. 「지금 여러 군영의 병사들이 왜도를 쓰는 것은 체건에게서 시작되었다.」
발자국 없는 칼춤은 아들의 전기에 실린 이야기라 그대로 다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일본 검술을 조선 군영에 들여왔다는 것은 여러 기록이 함께 말한다.
네 개의 유파, 그리고 교전
『무예도보통지』에는 그가 들여온 왜검이 네 유파로 실려 있다. 토유류, 운광류, 천유류, 유피류다. 일본의 어느 유파와 이어지는지는 학자들이 추정할 뿐 확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교전」이 있다. 두 사람이 칼을 들고 마주 서서 주고받는 겨루기의 짜임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이것이 김체건이 왜검을 익히다 새 뜻을 얻어 만든 것이라고 적는다. 범례에는 「교전은 왜검에서 나왔으므로 그 뒤에 붙인다」는 줄이 있다. 겨루기는 칼을 던지고 맨손으로 붙잡는 동작으로 끝난다.
적의 칼을 배워 와서 조선의 겨루기로 다시 짠 것이다.
이 이야기의 근거
정사·관찬 문헌·개인 기록이 섞여 있다. 일본에 가서 배웠다는 이야기는 『무예도보통지』 왜검조와 승정원일기, 왜관에 몰래 들어갔다는 이야기와 재 위의 칼춤은 유본학의 「김광택전」에 있다. 이 편에서 『무예도보통지』 왜검조와 승정원일기의 원문은 직접 옮기지 못하고 연구자의 정리를 따랐다. 그를 다룬 소설과 드라마의 장면은 사실 자료가 아니다.
적의 칼을 배우는 일은 굴복일까, 준비일까. 김체건이 왜관에서 몰래 본 것은 칼 쓰는 법이었을까, 적을 아는 법이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