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업 — 실록에는 싸우는 장면이 없다,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은 소설이었다

1646 6월 · 백마산성 (평북 의주) · 서울

해 질 녘 북쪽 국경의 산성 위에서 멀리 연기를 바라보는 장수의 뒷모습
AI 재현 실제 사진이 아니라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해 그린 그림

임경업은 조선 후기 사람들이 가장 사랑한 장군 가운데 하나다. 그를 모시는 사당이 여러 곳에 있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임경업전』은 널리 읽혔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서 그가 칼을 들고 싸우는 장면을 찾으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실록 속의 임경업

실록에 남은 임경업은 대개 보고서를 쓰는 장수다.

병자호란 두 해 전, 의주 부윤 임경업은 이렇게 보고했다. "겨울 방비가 코앞인데 산성 지키는 일이 매우 급합니다. 백마산성은 성가퀴가 847개라 한 곳에 다섯 명씩만 잡아도 4천 명이 넘게 필요한데, 이 고을에 사는 백성은 겨우 2백 호, 남녀노소를 다 합쳐도 6백 명뿐입니다."

병자호란이 터지자 청나라 군대는 의주를 지나 곧장 서울로 내려왔다. 전쟁 중에 사헌부와 사간원은 「적이 강을 건넌 뒤 어느 한 곳에서도 막지 못했다」며 도원수와 함께 임경업까지 벌하라고 청했다. 인조는 따르지 않았다.

명나라와 손을 잡다

전쟁 뒤 조선은 청을 섬겨야 했다. 임경업은 몰래 명나라와 손을 잡으려 했다. 뒷날 국문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자와 대군이 호랑이 굴에 잡혀가 있으니 모시고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승려를 명나라에 들여보내 우리 사정을 알리고, 군사를 청해 의주 길을 끊으면 저들이 겁을 먹고 세자를 돌려보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일이 청에 드러났다. 청은 그를 잡아 보내라고 했다. 압송되던 그는 중간에 달아나 승려의 모습으로 숨었다가 명나라로 건너갔다. 그러나 명나라는 곧 무너졌고, 그는 청에 붙잡혔다. 청은 그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조선에서 그는 심기원의 역모에 얽혀 국문을 받았다. 형장을 맞으며 그가 외쳤다. "조정에서는 이미 천하의 일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나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

다음 날 그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 인조가 말했다.

"경업이 죽었단 말인가. 그가 역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알려 주려 하였는데 틀렸구나. 제법 장대하고 실하게 보이더니 어찌 이렇게 빨리 죽었단 말인가. 담력이 커서 나라가 믿고 의지할 만하였는데, 애석할 뿐이다."

「담력이 크다.」 실록이 임경업의 용기를 직접 적은 말은 사실상 이것뿐이다.

소설 속의 임경업

그가 죽고 수십 년 안에 『임경업전』이 나왔다. 숙종 때는 이미 민간에서 널리 읽혔다는 기록이 있다.

소설 속 임경업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명나라에 들어가 가달이라는 나라의 침략을 물리쳐 명을 구한다. 청나라는 그의 용맹이 두려워 의주를 피해 다른 길로 쳐들어온다. 그는 돌아가는 청군을 섬멸하려 하지만 세자와 대군이 말린다. 청나라 왕은 끝내 그에게 감복해 세자와 함께 그를 돌려보낸다. 그리고 그는 간신 김자점의 손에 죽는다.

가달과의 싸움도, 청나라 왕의 감복도 실록에는 없다. 사실과 반대인 대목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한 것은 실록 속 보고서를 쓰는 장수가 아니라, 병자호란의 치욕을 대신 갚아 주는 장군이었다.

한 사람은 그렇게 두 번 살았다. 한 번은 실록에서, 한 번은 소설에서.

이 이야기의 근거

정사와 후대 기록이 뚜렷이 갈린다. 백마산성 보고, 탄핵, 명과의 내통, 국문과 죽음은 인조실록에 있다. 실록에는 그가 직접 싸우는 장면이 없다. 무용담은 소설 『임경업전』에서 온다. 그는 숙종 때 관작을 되찾았고 정조 때 충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람들은 왜 실록 속 임경업이 아니라 소설 속 임경업을 사랑했을까. 소설이 지어낸 승리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거짓이었을까, 위로였을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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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 속 소드마스터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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