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9년 봄, 조선 군사 1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넜다. 명나라가 새로 일어난 후금을 치겠다며 군사를 보내라고 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보냈다. 김응하는 좌영장이었다.
명나라와 조선의 군대는 심하,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푸순 근처에서 후금의 기병과 맞닥뜨렸다.
바람이 거꾸로 불다
광해군일기에 남은 평안 감사의 보고는 이렇다.
명나라 장수가 먼저 후금의 복병을 만나 무너졌다. 김응하는 들판에 진을 치고 말을 막는 나무 울타리를 세웠다. 군사는 수천에 불과했다. 화포를 쏘게 했으나 서북풍이 거세게 불어 화약이 날리고 불이 꺼졌다. 후금의 철갑 기병이 그 틈에 짓밟아 들어왔고, 좌영이 무너졌다.
큰 나무 아래에서
그다음 장면이 이 시리즈에서 가장 오래 남는 장면 가운데 하나다.
「응하는 홀로 큰 나무에 기대어 큰 활 세 개를 번갈아 쏘았다. 시위를 당기는 족족 맞혀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적은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뒤쪽에서 찔렀다. 쇠창이 가슴을 뚫었는데도 그는 쥐고 있던 활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적의 말이 이어진다.
「오랑캐들도 모두 감탄하고 아까워하며 서로 말했다. '이런 사람이 두어 명만 있었어도 정말 당해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의류장군이라 불렀다.」
의류(依柳)는 버드나무에 기댔다는 뜻이다. 그래서 오늘날 그는 버드나무 아래서 싸운 장수로 기억된다. 그런데 실록의 그 앞 문장은 「큰 나무(大樹)」라고만 적었다. 버드나무는 적이 붙인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같은 보고에는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가 후금에 항복하는 대목이 바로 이어진다. 한쪽은 활을 쥔 채 죽었고, 한쪽은 군대를 이끌고 항복했다.
활을 놓지 않은 사람의 기록
광해군은 그에게 벼슬을 내리고 가족을 돌보게 했다. 그가 지나간 길목에 사당을 세우게 했고, 사당에 「충렬」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2년 뒤 훈련도감에서 그의 일을 모은 책 『충렬록』을 펴냈다.
명나라에서도 그를 기렸다. 황제의 조서가 내려와 그를 요동백에 봉했다고 『충렬록』은 전한다. 그런데 이 조서는 문체가 정식 임명 문서와 다르다는 이유로 뒷날 잘못 전해진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 의심이 풀린 것은 거의 이백 년 뒤 정조 때였다. 정조는 「믿을 만한 책에서 확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제 의심이 깨끗이 풀렸다」고 했다.
인조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목숨을 버리고 의를 따름으로써 삼백 년 동안 내려온 강상을 혼자 붙들었다.」
이 이야기의 근거
정사. 마지막 장면은 광해군일기 광해 11년 3월 12일의 평안 감사 보고에 있다. 실록은 「큰 나무」라고 적었고, 「버드나무」는 후금 사람들이 붙인 「의류장군」이라는 이름에서 왔다. 요동백 추봉은 『충렬록』이 전하며, 정조 때까지 진위 논란이 있었다.
같은 들판에서 한 사람은 활을 쥔 채 죽었고, 한 사람은 항복했다. 그런데 항복한 강홍립에게도 광해군의 밀명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면 이 들판에서 끝까지 싸운 사람은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이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