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련 — "말 달리고 칼 쓰는 것이 가장 날랬다", 천하다고 탄핵받은 장수의 마지막

1597 9월 · 공주·회덕 일대 · 안현 (서울 서대문 안산) · 이천

새벽 언덕을 전속력으로 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조선 기병의 뒷모습
AI 재현 실제 사진이 아니라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해 그린 그림

이 시리즈에서 실록이 칼 솜씨를 직접 적은 사람은 드물다. 한명련은 그 드문 사람이다.

가장 날랬다

임진왜란 중인 어느 날, 선조가 체찰사 이원익에게 물었다. "한명련은 어떤 사람인가?"

이원익이 답했다.

"그의 군대는 이미 지쳐 마흔에서 쉰 명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날마다 싸울 때처럼 엄하게 경계합니다. 신이 때때로 불러 재주를 시험해 보았는데, 말 달리고 칼 쓰는 것이 가장 날랬습니다. 당상관의 몸인데도 졸병처럼 처신하여 산비탈을 오르내릴 때 걸어 다니기도 합니다."

「말 달리고 칼 쓰는 것이 가장 날랬다.」 원문은 네 글자 두 마디다. 馳馬用劍 最爲趫捷. 나이는 서른 남짓이라고 했다. 사관은 이렇게 덧붙였다. 「전공으로 졸병 가운데서 뽑혀 당상까지 올랐다.」

종일 싸운 날

정유재란 때 한명련은 별장으로 충청도에서 싸웠다. 도원수 권율의 보고가 실록에 있다.

왜적이 진산에서 산길로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한명련은 아침을 먹고 기다렸다. 선봉이 갑자기 들이닥쳤고, 곧이어 수많은 왜적이 크게 몰려왔다. 그는 종일 힘껏 싸워 이백 명 가까이를 쏘아 죽였다. 그러나 적은 많고 날은 어두워져 목은 여섯만 베어 왔다.

얼마 뒤 그는 총알에 맞아 서울로 올라왔다. 선조는 「상처가 가볍지 않으니 서툰 의원에게 맡길 수 없다」며 궁궐의 의원을 보냈다. 사관은 이렇게 적었다. 「명련은 힘껏 싸운 장사다. 앞장서서 돌격하여 베고 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임금이 장하게 여겼다.」

명나라 장수 마귀도 그를 정기룡, 김응서와 함께 호걸로 꼽았다. 「지난번 대구와 삼가의 싸움에서는 한명련이 잘 싸웠다」고 했다.

하천한 사람

전쟁이 끝나갈 무렵 그는 오위장이 되었다. 그러자 사헌부가 들고일어났다.

"오위장 한명련은 하천한 사람인데 이 자리에 앉으니, 같은 반열의 관원들이 그와 동료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바꾸소서."

선조가 답했다. "한명련 같은 사람이 어찌 오위장이 되지 못하겠는가. 바꿀 수 없다."

칼 하나로 졸병에서 장수가 된 사람을 조정은 끝내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괄의 난

그 뒤 그는 북쪽 변방의 장수로 오래 있었다. 1624년, 그와 이괄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발이 들어왔다. 압송되던 한명련은 이괄에게 구출되어 반란군에 합류했다.

이괄과 한명련의 군대는 서울까지 들어왔다. 실록은 두 사람을 두고 「두 역적이 모두 군사를 잘 부렸다」고 적었다. 그러나 안현, 지금의 서대문 안산에서 관군에게 크게 졌다. 두 사람은 이천 쪽으로 달아났고, 그날 밤 부하 이수백과 기익헌 등이 불을 놓아 공격해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었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와 아들들도 처형되었다. 아들 하나, 한윤만이 달아났다.

후금으로 간 아들

한윤은 압록강을 건너 후금으로 갔다. 3년 뒤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왔다. 정묘호란이다. 의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에 이런 줄이 있다. 「한윤이 다 적진에 있었다.」

칼 솜씨로 졸병에서 장수가 된 아버지는 반역자가 되었고, 그 아들은 적의 군대와 함께 돌아왔다.

이 이야기의 근거

정사. 이원익의 평, 정유재란의 싸움, 마귀의 평, 사헌부의 탄핵은 선조실록, 이괄의 난과 죽음, 아들 한윤의 행적은 인조실록에 있다. 실록은 그를 「하천한 사람」이라고 적었을 뿐 정확한 신분은 밝히지 않았다.

조정이 그를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였다면 그의 끝은 달라졌을까. 칼 솜씨로 오른 자리에서 사람들이 끝내 보지 않으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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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 속 소드마스터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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