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룡 — "말에서 내려 적을 베고 곧 다시 말에 올랐다", 그리고 육십 전 무패라는 말의 뿌리

1592 · 김산(김천) · 거창 · 상주 · 고령

논 사이 길에서 말에서 뛰어내려 왜군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조선 장수, 곁에서 기다리는 말
AI 재현 실제 사진이 아니라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해 그린 그림

정기룡은 「육지의 이순신」으로 불린다. 「육십 번 싸워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말도 함께 따라다닌다. 이 편은 그 말들이 어디서 왔는지 보면서, 실록에 남은 정기룡을 찾아본다.

박진의 증언

임진왜란 이듬해 겨울, 선조 앞에서 장수들의 이야기가 오갔다. 경상도에서 싸운 장수 박진이 정기룡을 두고 말했다.

"정기룡은 싸울 때 말에서 내려 적을 베고는 곧 다시 말에 오르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조경이 적에게 죽을 뻔했는데 정기룡 덕분에 살았습니다."

실록에 남은 정기룡의 무용 가운데 가장 생생한 문장이다. 말에서 내려 칼을 쓰고 다시 오르는 것은 그만큼 몸이 가볍고 날래야 하는 일이다.

조경은 경상도 방어사였다. 전쟁 초 김산, 지금의 김천에서 싸우다 칼에 다친 기록이 실록에 있다. 정기룡이 혼자 말을 달려 적진에서 조경을 구해 냈다는 이야기는 뒷날 송시열이 쓴 그의 신도비명에 자세히 전한다. 송시열은 그 싸움을 조자룡에 견주었다.

선조가 말했다. "정기룡 같은 사람을 판관에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유성룡이 거들었다. "기룡은 젊고 재주와 꾀가 있을 뿐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 데도 능합니다."

명나라 장수의 평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가 조선 장수들을 두고 말했다.

"귀국 사람 가운데 정기룡, 김응서, 한명련은 모두 호걸이라 왜적을 잘 쏘아 죽이니 함께 적을 쳐 없앨 만합니다."

이 말에 함께 나오는 한명련은 다음 편의 주인공이다.

전쟁이 끝난 뒤 정기룡은 경상우병사를 거쳐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이순신이 앉았던 자리다. 그는 1622년 통제사로 있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두 갈래의 사관 평

그가 죽었을 때 광해군은 「또 어진 장수를 잃으니 매우 놀랍고 측은하다」고 했다. 그런데 같은 날 실록의 사관은 이렇게 적었다.

「기룡은 용감한 장수였다. 임진란에 힘써 싸워 공로가 있었는데, 궁궐 안의 사람들과 결탁하여 사사로이 바치기를 끊임없이 했다. 심지어 자개 팔첩 큰 병풍을 만들어 올리기까지 했으니, 죽어서도 남는 죄가 있다.」

전쟁의 맹장과 뇌물을 바친 통제사. 실록은 두 얼굴을 다 남겼다.

육십 전 무패는 어디서 왔나

「육십여 차례 크고 작은 싸움에 나가 늘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웠지만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이 문장의 뿌리는 정조 때 홍양호가 엮은 『해동명장전』까지 올라간다. 전쟁이 끝나고 거의 이백 년 뒤의 책이다. 실록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없다. 이 말은 2008년 정기룡을 다룬 소설이 나온 뒤 크게 퍼졌다.

그의 전공을 가장 많이 담은 책은 집안이 엮은 『매헌실기』다. 실록보다 훨씬 많은 싸움 이야기가 들어 있다. 거창 신창에서 기병 몇십으로 적 수백을 무찔렀다는 이야기, 상주성을 되찾은 이야기도 주로 여기서 나온다. 개인 기록이라 높이려는 마음이 섞였을 수 있지만, 그가 실제로 많이 싸운 장수라는 것까지 의심할 이유는 없다.

이 이야기의 근거

정사·개인 기록·후대 기록이 섞여 있다. 말에서 내려 적을 벤 일과 조경을 살린 일은 선조실록(박진의 증언), 마귀의 평도 선조실록, 사관의 평은 광해군일기에 있다. 단기로 적진에 들어간 장면은 송시열의 신도비명, 여러 싸움의 상세는 『매헌실기』, 「육십 전 무패」는 『해동명장전』에서 온다.

「육십 전 무패」라는 말을 지우면 정기룡은 작아지는 것일까. 말에서 내려 적을 베고 곧 다시 말에 올랐다는 한 문장만으로는 부족한 것일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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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 속 소드마스터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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