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 목책을 부수고 돌격한 젊은 장수, 활쏘기 자리에서는 과녁을 맞히지 못했다

1468 10월 · 북청 · 파저강 · 서울

날카로운 목책을 부수고 돌격하는 젊은 조선 장수와 기병
AI 재현 실제 사진이 아니라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해 그린 그림

남이는 태종의 외증손이다. 할머니가 태종의 딸 정선공주였다. 젊은 나이에 무과에 붙었고, 이시애의 난과 여진 정벌에서 이름을 떨쳤으며, 스물여섯에 처형되었다.

남이에 관해서는 귀신을 쫓았다는 이야기, 시 한 글자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 편은 실록에 적힌 남이부터 본다.

목책을 부수다

이시애가 함경도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남이는 사자위장으로 진압군의 선봉에 섰다. 대장 강순은 이렇게 보고했다.

"남이와 이숙기를 선봉으로 삼아 종개동에 이르니, 적이 나무 울타리를 세우고 백여 명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남이가 먼저 울타리를 부수고 돌격하여 둘을 베고 스무 명 남짓을 사로잡고 짐 열 바리를 빼앗으니 나머지가 달아났습니다."

그해 가을에는 건주여진을 쳤다. 강순과 우상대장 남이가 만포에서 파저강으로 들어가 여진의 우두머리 이만주 부자를 베었다.

실록은 남이가 칼이나 활을 어떻게 썼는지는 따로 적지 않았다. 그 대신 이런 줄이 있다. 싸움이 끝난 뒤 「남이와 이숙기만 홀로 먼저 상을 받고 다투어 자기 공을 자랑했다」.

과녁 앞의 남이

이듬해 세조가 활쏘기 자리를 열었다. 실록은 이날의 남이를 이렇게 적는다.

「남이는 일찍이 대장이라 자칭하며 한때 무사들을 업신여겼는데, 이날은 여러 번 쏘아도 맞히지 못하므로 임금이 웃었다.」

같은 날 술에 취한 남이가 임금에게 말했다. "성상께서 귀성군을 지나치게 아끼시니 신은 그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의금부 옥에 갇혔다.

영웅 이야기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그래서 이 장면이 실록에 남은 것이 오히려 귀하다.

담을 넘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했다. 남이는 병조판서에 올랐다가 같은 날 바로 바뀌었다. 형조판서 강희맹이 「사람됨이 병사를 맡기기에 마땅하지 않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해 가을,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했다. 실록에 남은 체포 장면은 이렇다.

「남이가 칼을 차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담을 넘어 나갔다. 군사들이 그 머리털을 붙잡자 남이가 칼을 뽑으려 했고, 군사들이 함께 잡아 묶었다.」

국문 자리에서 남이는 말했다. "신은 어려서부터 활과 말을 업으로 삼아, 변경에 일이 있으면 먼저 공을 세워 나라를 돕는 것이 뜻이었습니다."

곤장을 맞은 뒤 그는 죄를 인정했다. 그리고 함께 끌려온 강순에게 탄식했다.

"나 같은 사람은 나이가 겨우 스물여섯인데 참으로 애석하다. 영웅의 재주를 잘못 썼구나."

그는 저잣거리에서 처형되었다. 며칠 뒤 그의 활과 화살과 큰 칼과 갑옷을 군기시에 거두어들이라는 명이 내려졌다.

시 한 글자

남이가 지었다는 시가 있다. 「남아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이라는 구절의 「평정하지 못하면(未平國)」을 유자광이 「나라를 얻지 못하면(未得國)」으로 바꾸어 고발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실록에 없다. 실록의 고발과 국문 기사에는 이 시가 나오지 않는다. 시와 글자 바꿔치기 이야기는 『연려실기술』『청야만집』『대동기문』 같은 뒷날의 야사와 구전에 전한다. 어린 남이가 권람의 딸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 그 인연으로 사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 이야기의 근거

정사와 야담이 섞여 있다. 종개동의 돌격, 파저강 정벌, 과녁 앞의 장면, 체포와 처형은 세조실록·예종실록에 있다. 시 한 글자 이야기와 귀신 이야기는 야사와 구전이다. 실록은 그를 처형한 쪽의 기록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왜 실록의 남이보다 야사의 남이를 기억할까. 과녁을 못 맞혀 임금이 웃었다는 장면보다, 억울한 시 한 줄이 더 그 사람 같아 보였던 것일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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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 속 소드마스터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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