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 투구 꼭지를 쏘아 떨어뜨리다, 그 장면을 적은 것은 그가 세운 나라였다

1380 9월 · 황산 (전북 남원 운봉)

말 위에서 멀리 백마 탄 젊은 적장의 투구를 겨누어 활을 당기는 장수의 뒷모습
AI 재현 실제 사진이 아니라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해 그린 그림

고려 말, 왜구가 남쪽 바닷가를 휩쓸었다. 어느 해 큰 무리가 내륙 깊이 들어와 지리산 자락의 운봉까지 올라왔다. 이성계가 이들을 막으러 갔다. 이 싸움이 황산대첩이다.

열다섯 살의 적장

조선 태조실록의 총서는 왜구 가운데 한 장수를 이렇게 그린다.

「한 적장이 있었는데 나이가 겨우 열대여섯이었다. 생김새가 단정하고 고왔으며 날래기가 비길 데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 나오면 그가 가는 곳마다 쓰러지고 흩어져 감히 맞서는 자가 없었다.」

고려군은 그를 아기발도라고 불렀다. 그는 갑옷과 투구를 단단히 갖추고 목과 얼굴까지 가리개를 써서 화살을 쏠 틈이 없었다.

꼭지를 쏘다

이성계는 그 용맹이 아까워 이두란에게 사로잡으라고 했다. 이두란이 답했다.

"사로잡으려면 반드시 우리 사람이 다칠 것입니다."

이성계가 말했다.

"내가 투구 꼭지를 쏘아 벗길 테니, 너는 곧바로 쏘아라."

그는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았다. 화살이 투구 꼭지를 정확히 맞혔다. 투구 끈이 끊어져 투구가 기울었다. 적장이 급히 투구를 바로잡았다. 이성계가 다시 쏘아 꼭지를 맞혔고,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그 순간 이두란이 쏘아 그를 죽였다.

그날의 이성계

총서는 이날 이성계도 화살을 맞았다고 적는다. 왼쪽 다리였다. 그는 화살을 뽑고 더욱 기운을 내어 싸웠다.

군사들에게 한 말도 남아 있다. "겁나는 자는 물러가라. 나는 적과 함께 죽겠다."

아기발도가 죽자 왜구의 기세가 꺾였다. 총서는 적이 고려군보다 열 배나 많았는데 겨우 칠십여 명만 지리산으로 달아났다고 적는다. 냇물이 붉어져 엿새 이레 동안 빛이 변하지 않아 사람들이 마시지 못했다고도 적었다. 이날 이성계가 쏜 화살 쉰여 발이 모두 적의 얼굴에 맞았다는 말도 있다.

백 번 쏘아 백 번

총서에는 이성계의 활 이야기가 끝없이 나온다. 우라산성에서 일흔여 발을 쏘아 모두 얼굴에 맞혔다. 덕암에서 활쏘기를 할 때는 「백 번 쏘아 백 번 맞혔다」. 사냥에서 사슴 마흔 마리를 쏘아 모두 등뼈를 맞혔다.

그런데 같은 황산 싸움을 고려사는 어떻게 적었을까. 고려사 우왕전의 기사는 이렇다. 「우리 태조가 여러 장수와 함께 운봉에서 왜구를 쳐서 크게 깨뜨리니 남은 적이 지리산으로 달아났다.」

한 줄이다. 열다섯 살의 적장도, 투구 꼭지도, 다리에 맞은 화살도 없다.

누가 적었나

태조실록은 태종 때 엮였다. 총서는 그 맨 앞에서 건국한 임금의 젊은 날과 싸움을 적은 글이다. 새 나라가 자기 시조를 어떻게 보여 주고 싶었는지가 그대로 담긴 글이다.

이성계가 활을 잘 쏘았다는 것은 의심하기 어렵다. 그러나 장면 하나하나의 생생함은 그가 세운 나라가 붙인 것이라는 점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이 이야기의 근거

정사. 다만 장면의 대부분은 조선 태조실록 총서에 있다. 고려사 우왕전에는 운봉에서 왜구를 크게 깨뜨렸다는 한 줄만 있다. 총서는 적장을 「아기발도」라고 적는다. 흔히 쓰는 「아지발도」라는 표기가 어디서 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긴 사람이 나라를 세우면 그의 싸움은 전설이 된다. 그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면, 황산의 이성계는 고려사의 한 줄로 남았을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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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 속 소드마스터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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