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취려 — 맏아들을 잃고도 다시 나갔다, 장면보다 이름이 먼저 남은 맹장

1216 8월 · 연주 · 개평역 · 박달현 · 강동성

단풍 든 고갯길을 내리달려 거란 무리를 향해 돌격하는 고려 장수와 기병
AI 재현 실제 사진이 아니라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해 그린 그림

몽골에 쫓긴 거란 사람들이 고려로 밀려 들어왔다. 고려 고종 때다. 이들은 수만이 떼를 지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며 고을을 짓밟았다. 이 난리를 막는 데 가장 자주 이름이 오르는 장수가 김취려다.

이 편은 솔직하게 시작해야 한다. 김취려는 큰 공을 세운 장수가 분명하지만, 그가 몸으로 싸운 장면은 다른 사람들만큼 또렷하게 전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시리즈에 넣은 것은 그가 남긴 자국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맏아들

거란 유민이 처음 쳐들어온 해, 김취려는 후군을 이끌고 서북쪽에서 싸웠다. 연주에서 포위를 깨고 달아나는 적을 개평역까지 쫓았다.

이 싸움에서 그는 맏아들을 잃었다. 자신도 다쳐 돌아왔다고 전한다.

그런데 그는 다시 나갔다.

박달재 너머

이듬해 거란 무리가 남쪽 깊이 내려왔다. 김취려는 최원세와 힘을 합쳐 맥곡과 박달현에서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박달현은 지금의 충북 제천 박달재 일대다. 쫓긴 거란 무리는 대관령을 넘어 동북쪽 여진 땅으로 달아났다.

거란 사람들이 고려의 한복판인 제천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그만큼 나라가 위태로웠다는 뜻이다. 그 길을 끊은 것이 이 싸움이었다.

강동성 — 몽골과의 첫 만남

거란 무리는 마지막에 평양 동쪽의 강동성에 들어가 버텼다. 이때 몽골군과 동진의 군대가 거란을 쫓아 고려 땅에 들어왔다.

고려는 조충을 원수로, 김취려를 병마사로 삼아 몽골·동진과 함께 강동성을 에워쌌다. 이듬해 정월 거란은 항복했다. 거란의 왕자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이 싸움은 고려가 몽골과 처음 손을 잡은 자리이기도 했다. 십여 년 뒤 그 몽골이 고려로 쳐들어온다.

키가 크고 수염이 배를 덮었다

고려사절요는 그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키가 여섯 자 다섯 치, 수염이 배를 지날 만큼 길었다.

그는 뒤에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고,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뒤인 1234년에 세상을 떠났다. 몽골과의 긴 전쟁이 막 시작된 때였다.

장면이 없는 맹장

척준경에게는 대사가 남았고 양규에게는 숫자가 남았다. 김취려에게 남은 것은 지명들이다. 연주, 개평역, 맥곡, 박달현, 강동성.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거란 무리가 물러갔다.

어떤 장수는 장면으로 기억되고, 어떤 장수는 그가 지킨 땅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이 이야기의 근거

정사. 고려사 열전 「김취려」와 고려사절요. 다만 이 편은 열전 원문을 직접 옮기지 못하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정리와 관련 항목(강동성 전투, 개평 전투, 최원세)에 기대어 썼다. 그의 묘지명도 남아 있다.

맏아들을 잃은 싸움터로 다시 나가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기록이 그 마음을 적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짐작해도 되는 것일까.

출처

관련 콘텐츠

이 글은 역사 속 소드마스터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지도에서 관련 사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