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는 김숙흥의 열전이 없다. 그의 이름은 양규 열전 안에서만 나온다. 그것도 몇 줄뿐이다.
그런데 그 몇 줄이 무겁다.
귀주의 별장
김숙흥의 벼슬은 귀주 별장이었다. 별장은 장군 아래의 무관이다. 높은 자리가 아니다.
거란이 두 번째로 쳐들어왔을 때, 그는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군을 쳐서 1만여 명을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일이 거란군이 밀려 내려오던 해의 일인지, 물러가던 이듬해의 일인지는 책마다 다르게 본다.
생년도, 고향도, 집안도 전하지 않는다. 그의 앞쪽 삶은 이 한 줄 앞에서 끊겨 있다.
그날 함께
거란군이 물러가는 길목에서 양규와 김숙흥은 함께 싸웠다. 애전에서 거란의 선봉을 세 번 이긴 그날, 거란 왕의 본대가 밀려왔다.
열전은 두 사람을 한 문장에 넣었다. 「양규와 김숙흥이 종일 힘껏 싸웠으나 군사도 다하고 화살도 다하여, 함께 진중에서 죽었다.」
도순검사와 별장. 벼슬의 높이는 크게 달랐지만, 마지막 문장에서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 섰다.
뒤에 받은 것
나라는 김숙흥에게 장군 벼슬을 내렸다. 그의 어머니 이씨에게는 해마다 쌀 50석을 주게 했다. 아내 이야기가 아니라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그는 젊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기록은 그것까지 말하지 않는다.
그 뒤 양규와 함께 공신으로 올랐고, 문종 때 내린 글에도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혔다. 「몸을 내던져 싸우며 잇달아 적을 깨뜨렸으나 화살이 고슴도치 털처럼 모여 함께 진 아래에서 죽었다.」
이름이 한 줄인 사람들
이 시리즈를 쓰다 보면 김숙흥 같은 사람을 자주 만난다. 누군가의 열전 안에 이름이 한 번, 많아야 두 번 나오는 사람들이다. 비녕자의 종 합절이 그랬고, 김흠운을 따라 죽은 보용나가 그랬다.
역사책은 주인공의 이름으로 편을 나눈다. 그러나 전장에서 싸운 것은 대개 이름이 한 줄인 사람들이었다.
이 이야기의 근거
정사. 고려사 열전 「양규」 안의 기록. 김숙흥의 독립된 열전은 없다. 보량과 함께 1만여 명을 벤 일의 연도는 자료마다 1010년과 1011년으로 갈린다.
열전의 제목이 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 그 사람의 이름으로 편을 하나 여는 일은, 역사를 바꾸는 일일까 바로잡는 일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