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흠운은 내물왕의 8세손이고, 태종무열왕의 사위였다. 골품으로 치면 신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가까운 사람이다.
어려서 그는 화랑 문노의 무리에서 지냈다. 무리 가운데 누가 싸우다 죽어 이름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흠운은 분해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같은 무리에 있던 승려 전밀이 그를 보고 말했다. "이 사람이 적진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비바람에 머리를 빗고
무열왕 때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의 국경을 자꾸 건드렸다. 왕이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치게 했고, 흠운은 낭당대감이 되어 따라갔다.
그는 출정하는 동안 집에서 자지 않았다. 열전은 이렇게 적는다. 「비바람에 머리를 빗고 씻으며 병사들과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했다.」
백제 땅에 들어가 양산 아래에 진을 쳤다. 조천성을 치려던 참이었다.
새벽의 기습
그런데 백제군이 밤을 틈타 빠르게 달려와, 동이 틀 무렵 보루를 타고 넘어 들어왔다. 신라군은 놀라 엎어지고 자빠지며 어찌할 줄 몰랐다. 백제군은 그 틈에 몰아쳤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흠운은 말을 가로 세우고 창을 쥔 채 적을 기다렸다.
대사 전지가 그를 말렸다.
"지금 적은 어둠 속에서 일어나 바로 앞에 있는 사람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공이 여기서 죽어도 그것을 알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공은 신라의 귀한 골품이고 대왕의 사위입니다. 적의 손에 죽으면 백제는 그것을 자랑할 것이고 우리에게는 깊은 부끄러움이 될 것입니다."
흠운이 답했다.
"대장부가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남이 알든 모르든 마찬가지다. 어찌 감히 이름을 구하겠는가."
그는 굳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따르던 사람이 말고삐를 잡고 돌아가자고 했지만 흠운은 칼을 뽑아 휘둘렀다. 적과 싸워 몇 사람을 죽이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뒤따른 사람들
대감 예파와 소감 적득도 함께 싸우다 죽었다.
보기당주 보용나는 흠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했다.
"저분은 골품이 귀하고 세력이 높아 사람들이 아끼는 분인데도 절개를 지켜 죽었다. 하물며 나 보용나는 살아서 보탬이 없고 죽어서 손해가 없는 사람이 아닌가."
그는 적진에 뛰어들어 서너 명을 죽이고 죽었다.
왕은 네 사람에게 벼슬을 높여 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양산가」라는 노래를 지어 그들을 슬퍼했다. 노래의 이름만 남고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남이 알든 모르든
이 이야기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칼보다 대사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물음에, 흠운은 남이 알든 모르든 같다고 답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 그 말을 듣고, 기억하고, 전했기 때문이다. 김부식은 이 열전 끝에 화랑 이야기를 붙이고 이렇게 적었다. 「흠운 같은 이도 화랑의 무리였다. 나랏일에 목숨을 바쳐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의 근거
정사. 삼국사기 열전 「김흠운」. 열전에는 해(영휘 6년, 655년)만 적혀 있고 달은 없다. 양산은 지금의 충북 영동 양산면 일대로 본다. 「양산가」는 이름만 전한다.
남이 알든 모르든 같다고 말한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