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자리를 늘어놓고 보면 흩어진 미담이 아니라 한 장의 도면이 된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길에는 순서가 있었다. 명부를 만들고, 불러 모으고, 가두고, 트럭에 싣고, 쏘았다. 다섯 마디다. 그리고 사람을 살린 이들은 예외 없이 이 다섯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끊었다.
첫째 마디, 명부. 오강환은 양산 웅상에서 명부를 파기했고, 노상도는 청원 낭성에서 지서 앞 신작로에서 태우게 했다. 종이가 사라지면 절차가 멈춘다.
둘째 마디, 소집. 이섭진은 영동 용화에서 독촉 전화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미뤘고, 안만근은 청주 남이에서 걸어가는 사람들을 소리쳐 돌려세웠으며, 황대흥은 괴산 불정에서 전선이 좋지 않으니 피하라고 일렀다. 함양 유림의 조 주임은 피난 방향만 바꿔 주었고, 합천 초계의 노호영과 최우영은 마을 입구에 서서 오는 사람들을 되돌려 보냈다.
셋째 마디, 구금. 열한 자리로 가장 많고, 살아난 사람도 여기서 가장 많다. 안종삼이 구례에서 480명을, 최대성이 김해 한림에서 면 전체를, 정원모와 김대곤 형제가 청주 오근장에서 150명에서 200명을, 남정식이 강서에서 사람들을 산에 올려 보내고 돌려보냈다. 김노헌과 김춘옥은 감시자를 재우고 자물쇠를 뜯었다. 천안의 김종대, 영천의 임태선, 합천 가회의 허임상, 청주 북일의 한봉수, 부강의 이 주임도 이 마디에서 끊었다.
넷째 마디, 이송. 확인된 것은 안대용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그는 헌병에게 사살됐다.
다섯째 마디, 명령서. 문형순 한 사람뿐이다. 그는 종이 위에 여섯 글자를 적어 돌려보냈다.
여기서 한 가지 규칙이 보인다. 앞쪽 마디를 끊은 사람일수록 살아남았고, 뒤로 갈수록 값이 비쌌다. 명부는 태워도 없어졌다고 우길 수 있지만, 트럭에 실린 사람은 이미 절차 안에 들어간 몸이다. 그 단계에서 끊는 것은 집행 방해가 된다. 그래서 확인된 자리 가운데 이송 단계는 하나뿐이다.
치른 값도 자리마다 달랐다. 안대용은 목숨을 잃었다. 이섭진은 살려준 죄로 특무대에 불려가 조사받고 퇴직할 때까지 감시당했다. 오강환은 계엄사에 연행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반대로 안종삼은 도의원이 됐고 문형순은 경찰영웅이 됐다. 무엇이 갈랐는지는 지금도 설명하기 어렵다.
또 하나. 이들은 대개 지서 주임과 면장이다. 경찰서장이 셋, 형사가 하나, 면장이 둘이고 나머지는 지서 주임이며, 제복도 직위도 없는 민간인이 몇 있다. 왜 지서 주임과 면장이 많았을까. 그 자리가 관내 사람을 명부의 이름이 아니라 얼굴로 아는 마지막 자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남정식이 남긴 말이 그렇다. 얼굴을 모두 알고 있던 순박한 사람들을 죽게 놔둘 수 없었다.
반대로 CIC와 헌병은 밖에서 들어와 명단과 등급만 보고 움직였다. 최대성이 지서 단계의 사람을 전부 살려냈는데도 CIC가 직접 연행한 4명은 죽었고, 황대흥이 1차에서 빼낸 사람들도 CIC의 2차 소집에는 걸렸다. 아는 얼굴이 없는 조직에는 끊을 이유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리즈가 말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해 둔다. 이 자리들을 다 합쳐도 살아난 사람은 이천 명 남짓이다. 그해 여름 희생된 사람은 공식 확인만 4,934명, 추정치로는 최소 6만에서 20만이 넘는다. 사슬은 대부분의 자리에서 끊기지 않았다. 이 도면은 어디서 끊길 수 있었는가를 보여줄 뿐, 어디서 끊겼는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자리들이 지우는 문장이 하나 있다. 명령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