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의 화가다. 생몰년이 정확하지 않다. 1712년 무렵 태어나 1786년 무렵 죽은 것으로 본다.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
그는 자기 호를 호생관(毫生館)이라 했다.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조선에서 화가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흔치 않다. 그림은 교양이지 생업이 아니라는 것이 사대부의 태도였다.
그는 중인 출신이었고 실제로 그림을 팔아 살았다. 그것을 감추지 않고 이름으로 삼았다.
이름 북(北) 자를 둘로 갈라 칠칠(七七)이라 쓰기도 했다.
눈을 찌른 일
남공철이 쓴 「최칠칠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세도가가 그에게 그림을 요구했다. 그가 응하지 않자 위협했다.
최북이 말했다.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
그 뒤로 그는 한쪽 눈에 안경을 걸치고 그림을 그렸다.
금강산
같은 글에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금강산 구룡연에 갔을 때다.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해 울다 웃다 하더니 이렇게 외쳤다.
천하의 명인 최북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
그리고 몸을 던져 뛰어들려 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붙잡아 말렸다.
그림값
그림값을 두고도 이야기가 전한다.
그림을 주고 값을 적게 받으면 화를 내며 그림을 찢었다. 반대로 그림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값을 많이 주면 비웃으며 돌려보냈다.
자기 그림의 값을 자기가 정하겠다는 태도다.
남긴 그림
그의 그림 가운데 「공산무인도」가 자주 언급된다. 빈 산에 사람이 없고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는 화제가 적혀 있다.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라 불리기도 했다.
산수와 화조를 두루 그렸고, 거칠고 빠른 붓질이 특징으로 꼽힌다.
마지막
그의 죽음에 대해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눈 오는 날 술에 취해 성 밖을 걷다가 그대로 쓰러져 얼어 죽었다는 것이다.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다. 다만 그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조선의 화가 가운데 이만큼 기행으로 기억되는 사람도 드물다.
그런데 그 기행들을 하나로 꿰면 방향이 보인다. 그림을 요구하는 권력에 응하지 않았고, 자기 그림의 값을 남이 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불렀다. 먹고사는 일을 남에게 맡기지는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