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0년, 성종 11년에 한 여자가 교형에 처해졌다.
죄목은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었다.
누구인가
본명은 박어우동으로 전한다. 아버지는 승문원 지사를 지낸 박윤창이다. 양반 집안이다.
종실인 태강수 이동과 혼인했으나 이혼했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가까이하면서 그를 내쫓았다는 기록이 있다.
혼인이 깨진 뒤 그는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 실록에 그 상대들의 이름이 여럿 적혀 있다.
종친도 있고 벼슬아치도 있고 노비도 있다.
논쟁
이 사건에서 조정이 오래 논의한 것은 사실 여부가 아니라 형량이었다.
당시 법전에 따르면 이런 경우 사형까지 가지는 않았다. 유배가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성종이 사형을 주장했다. 풍속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신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법대로 하자는 쪽과 왕의 뜻을 따르자는 쪽이 있었다.
결국 사형이 집행되었다.
남자들은
같은 사건에 연루된 남자들의 처벌은 달랐다.
대부분 유배나 파직에 그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복귀한 사람도 있다.
같은 일을 두고 한쪽은 목숨을 잃었고 다른 쪽은 벼슬로 돌아갔다.
이 차이는 당시에도 지적되었다. 실록에 그런 문제 제기가 남아 있다.
왜 그렇게 되었나
성종 대는 성리학적 질서를 사회 전반에 세워가던 시기다.
여성의 재혼을 제한하고, 정절을 강조하고, 가문의 내부 질서를 엄격히 하는 규범이 이 무렵부터 강해진다.
어우동 사건은 그 과정에서 본보기가 되었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한 사람의 죄를 다스린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기준을 세운 것이다.
그 뒤
그가 죽은 뒤 이야기는 계속 자랐다.
야담집에 그의 이야기가 실렸고, 내용은 점점 자극적으로 변했다. 실록에 없던 일화들이 붙었다.
오늘날 어우동이라는 이름이 불리는 방식도 대체로 그 방향이다.
실록이 적은 것은 이혼당한 여자가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었고, 법에 없는 형벌로 죽었다는 사실이다.
그 뒤 오백 년 동안 붙은 것은 그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