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때 황해도를 뒤흔든 도적이다. 양주의 백정 출신이었다.
3년
1559년 무렵부터 그의 무리가 기록에 나타난다.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었다.
조정이 여러 차례 군사를 보냈으나 잡지 못했다. 무리가 산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고, 지역 사람들이 그들을 숨겨주었기 때문이다.
관군이 도리어 당하는 일도 있었다. 부장이 죽고 군사가 흩어진 기록이 여럿이다.
1562년, 토포사 남치근이 대규모 병력으로 구월산을 포위했다. 무리 가운데 서림이라는 자가 먼저 잡혀 정보를 넘겼다.
임꺽정은 붙잡혀 죽었다. 3년이 걸렸다.
사관이 쓴 것
이 사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도적의 행적이 아니라 실록에 붙은 사관의 논평이다.
명종실록의 사관은 이렇게 적었다.
도적이 생기는 것은 도적질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굶주림과 추위에 몰려 살아갈 방법이 없어 부득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 썼다. 백성이 도적이 된 것은 수령의 가혹한 수탈 때문이고, 수령이 그렇게 된 것은 재상들이 탐욕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적을 잡는 것으로는 근본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조의 공식 기록에서 도적의 처지를 이렇게 정면으로 변호한 대목은 드물다.
그가 산 시대
명종 대는 외척 윤원형이 권력을 쥐고 있던 시기다. 앞서 정렴 편에서 본 을사사화가 그 시작이었다.
토지 겸병이 심해졌고 세금이 무겁게 매겨졌다. 흉년이 이어졌다. 백성이 살던 곳을 떠나 떠도는 일이 많았다.
임꺽정의 무리는 그렇게 떠돌게 된 사람들로 채워졌다.
의적인가
임꺽정을 의적으로 부르는 것은 뒤에 붙은 해석이다.
실록에는 그가 빼앗은 것을 백성에게 나눠주었다는 기록이 없다. 관아와 부잣집을 털었고, 그 과정에서 사람이 죽기도 했다.
다만 그를 숨겨준 사람들이 계속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관에서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반복된다.
지역 사람들이 도적을 관보다 덜 두려워했거나, 혹은 관보다 덜 미워했다는 뜻일 것이다.
소설
1928년부터 홍명희가 신문에 「임꺽정」을 연재했다. 십 년 넘게 이어진 대작이다.
이 소설을 통해 임꺽정은 조선 후기 민중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임꺽정의 모습은 상당 부분 이 소설에서 왔다.
실록의 도적과 소설의 인물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점은 앞의 두 편과 같다.
다만 이 경우에는 실록 자체가 이미 그 방향을 열어두었다. 도적이 왜 생기는지를 사관이 먼저 적어두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