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마지막 시기의 최고 무장이다. 그리고 고려와 함께 끝났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이 말은 그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로 전한다.
아버지 최원직이 죽을 때 열여섯 살이던 그에게 남긴 훈계라고 한다. 최영은 그 말을 평생 마음에 새겨 띠에 적어두고 다녔다고 기록됐다.
실제로 그는 재물을 모으지 않았다. 고려사는 그의 집이 검소했고 손님이 와도 대접할 것이 변변치 않았다고 적었다.
무엇을 했나
젊어서부터 왜구와 싸웠다. 홍건적이 개경까지 밀고 내려왔을 때도 그가 있었다.
1376년 홍산에서 왜구를 크게 깨뜨렸다. 이때 그의 나이 예순이었다. 화살에 입술을 맞고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제주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도 그가 진압했다.
1388년
명이 철령 이북 땅을 자기네가 차지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공민왕이 되찾은 그 땅이다.
최영은 요동을 치자고 주장했다. 우왕이 동의했다.
이성계가 반대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면 농사를 망친다는 것, 왜구가 그 틈을 노린다는 것, 장마철이라 활이 풀리고 병이 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럼에도 출정이 결정되었다. 최영이 총사령관이 되었으나 우왕이 그를 곁에 두려 해서 실제 부대는 조민수와 이성계가 이끌었다.
위화도에서 이성계가 군대를 돌렸다.
개경으로 돌아온 군대가 최영을 잡았다. 그는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 처형되었다. 일흔셋이었다.
죽으며 한 말
고려사가 전하는 그의 마지막 말은 이렇다.
내가 평생 탐욕이 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무덤에 오래도록 풀이 나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붉은 무덤이라는 뜻의 적분(赤墳)이라 불렸다.
지금 경기도 고양에 그의 묘가 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볼까
무덤에 풀이 나지 않았다는 것은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다. 지금 그의 묘에는 잔디가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만들어져 오래 전해졌다는 사실은 남는다.
조선을 세운 사람들은 최영을 죽였다. 그런데 조선 사람들이 그를 계속 기렸다. 청렴의 상징으로 인용했고, 무속에서는 최영 장군을 신으로 모셨다. 지금도 여러 곳에 최영을 모신 사당이 있다.
새 왕조가 제거한 사람을 그 왕조의 백성들이 계속 기억한 것이다.
요동 정벌을 두고는 평가가 갈린다. 무모했다는 시각과, 명이 무리한 요구를 해온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대응이었다는 시각이 함께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이 있다.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린 그 결정으로 고려가 끝나고 조선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