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노국공주 — 개혁하던 왕이 멈춘 자리

1365 2월 · 개경 · 현정릉

고려 말에 가장 크게 움직인 왕이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완전히 멈춘다. 그 경계에 한 사람의 죽음이 있다.

원에서 온 부인

공민왕은 왕이 되기 전 원의 수도에서 10년 가까이 볼모로 지냈다. 그곳에서 원 황족의 딸과 혼인했다. 노국대장공주다.

1351년 그가 왕이 되어 돌아왔다.

원의 공주를 아내로 둔 왕이 원을 밀어내는 개혁을 시작한다. 몽골식 변발과 복식을 금했고, 원이 설치한 정동행성 이문소를 없앴다. 100년 가까이 원이 차지하고 있던 쌍성총관부를 쳐서 철령 이북 땅을 되찾았다.

원에 붙어 권세를 누리던 기철 일파를 제거했다. 기철은 원 황제의 황후가 된 기황후의 오빠였다.

원이 반발했다.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 그때마다 노국공주가 남편 편에 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363년 흥왕사에서 반란이 일어나 자객이 왕의 침소까지 들어왔을 때, 노국공주가 문 앞을 막고 서서 들여보내지 않았다는 대목도 고려사에 있다.

1365년

노국공주가 아이를 낳다 죽었다.

그 뒤 공민왕은 달라진다.

그는 공주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밤낮으로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음식을 올리고 말을 걸었다. 무덤을 크게 짓고, 그 옆에 영전이라는 건물을 세우는 공사를 시작했다.

이 공사가 몇 해에 걸쳐 이어졌다. 규모가 지나쳐 재정이 크게 소모되었고 백성이 동원되었다. 신하들이 여러 차례 중단을 청했으나 듣지 않았다.

정사에서 손을 뗀 자리를 메운 것이 신돈이다. 앞 편에서 본 그 개혁이 이 시기에 이루어진다.

마지막

1371년 신돈을 제거한 뒤 공민왕은 더 이상해졌다.

자제위라는 조직을 만들어 젊은 귀족 자제들을 곁에 두었다. 고려사는 이 무렵 그의 행동에 대해 여러 기록을 남겼는데, 상당히 자극적인 내용이다.

1374년, 그는 자제위의 홍륜과 환관 최만생 등에게 침소에서 살해되었다. 마흔넷이었다.

기록을 어떻게 읽을까

공민왕에 대한 기록은 조선에서 정리되었다. 고려 마지막 시기를 어둡게 그릴수록 조선의 건국이 정당해진다.

특히 말년의 행실에 대한 서술은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다만 영전 공사가 실제로 국가 재정을 압박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노국공주의 죽음 이후 통치에서 손을 놓았다는 것 자체는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한 사람의 죽음이 한 나라의 방향을 바꾸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칠 수 있다. 공민왕의 개혁은 원의 쇠퇴라는 조건 위에서 가능했고, 그가 상대한 기득권은 그의 개인적인 상태와 무관하게 강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다. 1365년 이전과 이후의 이 왕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지금 개성에 그와 노국공주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현릉과 정릉, 함께 현정릉이라 부른다. 두 무덤 사이에 통로가 있다고 전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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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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