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이 개혁을 하려 했을 때 그가 찾은 사람은 신하가 아니라 승려였다.
왜 승려였나
고려사가 전하는 공민왕의 생각은 이렇다.
대대로 벼슬한 집안 사람들은 서로 얽혀 있어 남의 편을 든다. 새로 벼슬한 사람들은 자기 출신을 감추려고 그 집안들과 혼인해 결국 같아진다. 유학자들은 문생이니 좌주니 하며 서로 당을 이룬다.
그러니 세상을 떠나 홀로 선 사람을 써야겠다는 것이었다.
신돈은 그런 조건에 맞았다. 그의 어머니는 옥천사의 노비였다. 승려 사회 안에서도 그는 주변부에 있었다.
1365년, 공민왕이 그를 불러들여 국정을 맡겼다.
전민변정도감
이듬해 그가 만든 것이 전민변정도감이다. 토지와 백성을 바로잡는 관청이라는 뜻이다.
권세가들이 힘으로 빼앗은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양인으로 되돌리는 일을 했다.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고려사는 이렇게 적었다. 권세가들이 빼앗았던 땅을 주인에게 돌려주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했고, 노비로서 양인이 된 자들이 신돈을 두고 성인이 나왔다고 했다.
성인이라는 말이 백성들 입에서 나온 것이다.
무너지는 과정
그러나 그 개혁은 곧바로 반발에 부딪혔다.
땅과 노비를 잃은 쪽은 고려의 지배층 전체였다. 그들이 신돈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격의 방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가 승려의 계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권력을 사사로이 쓴다는 것이었다.
고려사에 실린 그의 사생활 관련 기록은 상당히 자극적이다. 다만 이 기록들은 그를 제거한 뒤 조선에서 정리된 것이라는 점을 함께 보아야 한다.
1371년, 그는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수원에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반역조
고려사는 그를 열전의 반역조에 실었다. 궁예와 견훤이 삼국사기 반역조에 실린 것과 같다.
조선을 세운 사람들 입장에서 고려 말의 개혁은 조선이 이어받아야 할 것이었지, 신돈이라는 승려의 공으로 남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 더 큰 문제가 하나 있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주장이다. 공민왕이 신돈의 여종에게서 얻은 아들이라고 알려진 우왕이 사실은 신돈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성계 세력이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울 때 명분으로 쓰였다. 가짜를 몰아내고 진짜를 세운다는 뜻의 말이 그때 나왔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이 주장을 대체로 정치적 조작으로 본다. 왕조 교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돈은 두 번 이용된 셈이다. 살아서는 개혁의 도구로, 죽어서는 왕조 교체의 명분으로.
무엇이 남았나
그가 만든 전민변정도감은 그의 실각과 함께 힘을 잃었다.
그러나 같은 문제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20년 뒤 조준과 정도전이 추진한 토지 개혁이 결국 같은 자리를 겨냥한다.
먼저 시도한 사람은 반역자로 남았고, 나중에 해낸 사람들은 개국공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