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중손과 삼별초 —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부대

1271 5월 · 진도 용장성 · 제주 항파두리

삼별초는 원래 도둑을 잡으려고 만든 부대였다.

최우가 밤에 순찰하는 야별초를 만들었는데 인원이 늘어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고, 여기에 몽골에 붙잡혔다가 도망쳐 온 사람들로 조직한 신의군이 더해져 삼별초가 되었다.

최씨 정권의 군사 기반이었고, 몽골과의 30년 전쟁에서 실제로 싸운 부대이기도 했다.

1270년

고려 조정이 몽골과 강화하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40년 가까이 이어진 강화도 시대가 끝난 것이다.

조정은 삼별초를 해산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하려 했다.

삼별초가 그 명부를 몽골에 넘길 것으로 판단하고 봉기했다. 배중손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들은 왕족인 승화후 왕온을 새 왕으로 세우고, 강화도의 재물과 사람을 배 천여 척에 싣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진도

그들이 자리 잡은 곳이 진도다. 용장성을 쌓고 궁궐을 지었다.

진도는 남해안 물길의 요충이었다. 삼별초는 전라도 연안과 남해의 섬들을 장악했고 개경으로 가는 세곡 운반을 끊었다.

일본에도 사신을 보냈다. 몽골이 곧 일본을 칠 것이니 함께 대응하자는 취지의 문서가 일본 쪽에 남아 있다. 다만 일본은 이 문서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271년, 고려와 몽골 연합군이 진도를 세 방향에서 쳤다. 용장성이 함락됐고 배중손은 전사했다. 왕온도 죽었다.

제주

살아남은 사람들이 김통정을 따라 제주로 갔다.

항파두리에 성을 쌓고 2년을 더 버텼다. 1273년, 연합군 만여 명이 제주로 들어왔다. 김통정은 산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270년부터 1273년까지, 3년이었다.

어떻게 볼 것인가

삼별초를 두고는 평가가 갈린다.

한쪽에서는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저항으로 본다. 몽골의 지배를 받아들인 조정과 달리 자주를 지키려 했다는 것이다.

다른 쪽에서는 무신정권의 사병 조직이 자기 기반을 지키려 한 것으로 본다. 실제로 이들은 최씨 정권의 군사력이었고, 해산 명령이 봉기의 직접적인 계기였다.

또 하나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삼별초가 진도와 제주에 자리 잡는 과정에서 그 지역 주민들이 겪은 일이다. 물자와 인력이 징발되었고, 진압군이 들어올 때는 다시 그 피해를 입었다.

어느 쪽 편에 서든 그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전쟁이었다.

남은 것

진도 용장성터와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가 남아 있다.

배중손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주는 개인적인 기록도 없다.

남은 것은 3년의 행적과 죽은 자리뿐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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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비한 인물사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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