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2년 겨울, 몽골의 2차 침입 때였다.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이가 처인성을 공격했다. 처인성은 성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토성이었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처인부곡의 주민들이었다. 부곡은 일반 군현보다 낮은 대우를 받던 특수 행정구역이다.
그 성에서 화살 하나가 날아가 살리타이를 맞혔다. 사령관이 죽자 몽골군은 물러났다.
세계를 휩쓸던 군대의 총사령관이 이름 없는 작은 성 앞에서 죽은 것이다.
그가 한 말
그 성에 승려 김윤후가 있었다. 백현원이라는 절에 있다가 난을 피해 성에 들어와 있었다.
조정이 그의 공을 인정해 상장군 벼슬을 주려 했다. 무관 최고위직이다.
김윤후는 사양했다. 고려사가 적은 그의 말은 이렇다.
싸울 때 나는 활도 화살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헛되이 큰 상을 받겠는가.
그리고 끝내 받지 않았다. 조정은 대신 섭랑장이라는 낮은 벼슬을 주었다.
이 말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해석이 갈린다.
하나는 겸양으로 보는 것이다. 공을 부하들에게 돌린 것이라는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그대로 사실로 보는 것이다. 살리타이를 쏜 사람은 따로 있었고, 그 사람은 부곡민이거나 노비였을 수 있다. 신분 때문에 그 공이 승려에게 돌아갔고, 김윤후가 그것을 바로잡으려 했다는 해석이다.
어느 쪽이든 남는 것은 같다. 실제로 화살을 쏜 사람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21년 뒤
1253년, 몽골이 다시 왔다. 김윤후는 그때 충주산성의 방호별감으로 있었다.
몽골군이 성을 에워쌌다. 70일이 넘게 이어졌다. 식량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지쳤다.
김윤후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힘을 다해 싸우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벼슬을 주겠다.
그리고 관청에 있던 노비 문서를 가져다 사람들 앞에서 불태웠다. 또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몽골군은 성을 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지 못했다.
조정은 약속대로 벼슬을 주었다. 관노와 백정에게까지 차등을 두어 관직이 내려졌다.
두 장면
첫 번째 장면에서 그는 자기가 하지 않은 일로 상을 받는 것을 거절했다.
두 번째 장면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한 일에 대해 확실히 값을 치르게 했다.
같은 원칙이다. 한 일에는 값이 있어야 하고, 하지 않은 일에는 없어야 한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