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았다고 다 같은 건 아니다 — 계통과 우연을 가르는 네 가지 도구

2010 · 라이프치히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멕시코의 원주민 문화에서 한민족의 흔적을 찾았다는 다큐멘터리가 이따금 화제가 된다. 상투를 닮은 머리 모양, 삼족오를 닮은 태양 문양, 우리말과 비슷하게 들리는 단어들. 앞 편에서 본 것처럼 시베리아와 아메리카가 실제로 이야기를 공유하니,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여기에는 시간이라는 걸림돌이 있다. 아메리카로 건너간 것은 최소 1만 5천 년 전의 일이고, 고구려는 2천 년 전의 나라다 — 고구려가 세워지기 1만 년도 더 전에 이미 갈라져 나간 사람들에게서 고구려의 흔적이 나올 수는 없다. 곰 이야기가 닮은 것과 고구려 문양이 닮았다는 주장은, 겉보기엔 같은 종류 같지만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둘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학자들이 실제로 쓰는 도구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낱개의 닮음이 아니라 체계적인 대응을 찾는다. 어휘 몇 개를 골라 비교하면 지구상 어떤 두 언어 사이에서도 닮은 단어를 만들어낼 수 있다 — 단어 수가 워낙 많으니 우연의 일치가 반드시 생기기 때문이다. 언어학자들이 두 언어의 친족 관계를 인정하는 기준은 훨씬 엄격하다. 이쪽 언어의 어떤 소리가 저쪽 언어의 어떤 소리로 규칙적으로, 수백 개 단어에 걸쳐 예외 없이 바뀌어야 한다.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는 이 시험을 통과했다. 한국어와 마야어는 통과한 적이 없다. 둘째, 경로와 시간의 연속성을 확인한다. 진짜 계보에는 중간이 있다. 비파형동검이 고조선의 유물인 이유는 그것이 요령에서 한반도까지, 시기와 지역이 사슬처럼 이어지며 출토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두 끝만 닮고 중간이 텅 비어 있다면 — 만주와 멕시코 사이의 수만 킬로미터에 아무 흔적이 없다면 — 그 닮음은 연결이 아니라 각자 도착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셋째, 따로따로 생겨났을 가능성을 먼저 따진다. 이집트에도 마야에도 피라미드가 있지만, 돌을 높이 쌓는 방법은 어차피 아래를 넓게 위를 좁게 만드는 것뿐이다 — 무너지지 않는 구조가 하나뿐이라면 닮음은 교류의 증거가 못 된다. 태양을 그리면 둥근 원이 되고, 태양 속에 신성한 새를 그려 넣는 상상은 여러 문화가 각자 해냈다. 인간의 몸과 지구의 물리 법칙이 같은 이상, 비슷한 답은 어디서든 나온다. 넷째, 그리고 요즘은 뼈에게 직접 물어본다. 독일 라이프치히의 한 연구소를 중심으로 수만 년 된 뼈에서 유전 정보를 읽어내는 기술이 지난 십수 년 사이 혁명적으로 발전했고(네안데르탈인의 유전체를 복원한 연구는 노벨상을 받았다), 이제 이야기와 유물이 침묵하는 자리에서 유전자가 증언한다. 그 증언에 따르면 아메리카 원주민의 뿌리는 시베리아의 옛 집단으로 수렴하며, 그 이후 콜럼버스 이전에 동아시아에서 대규모로 건너간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도구를 하나 더 시험해 보자. 유목민과 농경민의 차이가 워낙 근본적이니, 혹시 이것이 서로 다른 종의 대결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이 초원을 달리고, 네안데르탈인의 후손이 밭을 갈았던 것은 아닐까. 그럴듯하게 들리고, 두 삶의 방식이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상상이다. 그런데 네 가지 도구를 대면 곧바로 무너진다.

첫째로 시간이 맞지 않는다. 네안데르탈인은 약 4만 년 전에 사라졌고 농사는 약 1만 2천 년 전에 시작됐다. 2만 8천 년의 공백이 있다. 게다가 네안데르탈인은 농사를 지은 적이 없다. 계절을 따라 사냥감을 쫓아다닌 이동형 수렵민이었으니, 굳이 편을 가르자면 오히려 떠도는 쪽에 가깝다. 둘째로 농경은 한 곳에서 시작해 퍼진 것이 아니다. 서아시아, 황허, 양쯔강, 뉴기니, 메소아메리카, 안데스 등 최소 열 곳 이상에서 서로 무관하게 생겨났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전한 기술이라면 이렇게 여러 번 따로 발명될 수 없다. 셋째로 유전자가 정반대를 말한다. 아프리카 밖에 사는 사람은 유목민이든 농경민이든 모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조금씩 지니고 있다. 몽골 초원의 목축민도, 한반도의 농부도 마찬가지다. 두 집단을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배경인 것이다. 넷째로 순서가 거꾸로다. 3편에서 보았듯 전문 유목은 농경에서 갈라져 나온 후발 주자다. 유목민이 농경민보다 오래된 계통일 수 없다.

이 가설이 무너지는 방식이 앞의 멕시코 이야기와 똑같다는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둘 다 시간에서 걸린다. 그리고 둘 다 어떤 갈망에서 출발한다 — 하나는 우리 역사가 더 넓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하나는 인간의 차이에 더 깊은 이유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도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바람은 언제나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온다. 다만 이 가설이 향했던 직감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두 세계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관찰은 정확했고, 그 답이 종이 아니라 먹고사는 방식에 있다는 것이 4편에서 본 내용이다. 좋은 질문은 틀린 답을 거쳐서도 남는다.

이 네 가지 도구를 손에 쥐면 앞 편들의 풍경이 정리된다. 곰 의례와 잠수하는 창조자 — 체계적이고, 분포가 이어지며, 유전자의 증언과 겹친다. 계통이다. 상투와 삼족오와 마야 피라미드 — 낱개의 닮음이고, 중간이 비어 있으며, 독립 발생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우연이다. 도구는 감정이 없다. 우리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남의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걸러낸다.

마지막으로 이 도구가 꼭 필요한 논쟁 하나를 짚어두자. 만주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 — 정교한 옥 조각과 거대한 제단을 남긴 5천 년 전의 문화를 두고, 중국은 중화문명의 기원으로, 일부 한국인은 우리 민족의 뿌리로 끌어당긴다. 그러나 네 가지 도구를 들이대면 어느 쪽 소유권 주장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5천 년 전에는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훗날 생겨날 민족의 이름표를 그 이전의 시대에 소급해 붙이는 것 자체가 범주의 착각이다. 홍산문화는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여러 후대 문화가 갈라져 나온 상류의 물줄기다. 닮음을 다투기 전에 이 도구들을 통과시키는 습관 — 그것이 다음 편에서 다룰 가장 뜨거운 주제, "잃어버린 황금시대"의 이야기들을 다루는 유일하게 공정한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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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움직이는 인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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