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황금시대 — 에덴, 아틀란티스, 그리고 환단고기

-360 · 아테네

세계의 신화들을 모아 놓으면 한 가지 공통된 한숨이 들린다 — 옛날에는 좋았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인류가 황금의 시대에서 은, 청동을 거쳐 지금의 철의 시대로 굴러떨어졌다고 노래했다. 노동도 늙음도 없던 황금의 사람들은 사라지고, 우리는 수고하고 근심하는 철의 인간으로 산다고. 성경은 같은 이야기를 정원의 언어로 한다 — 일하지 않아도 열매가 있던 에덴에서 쫓겨나,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사는 존재가 되었다고. 흥미로운 것은 인류학이 여기에 내미는 각주다. 수렵채집 시절의 인간은 뜻밖에 여유로웠다는 연구들이 있다 — 하루 몇 시간의 채집과 사냥으로 먹거리가 해결되었고, 나머지는 쉬고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는 것("원초의 풍요사회"라는 이름이 붙었다). 농사는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렸지만 개개인에게는 더 긴 노동과 더 굽은 허리를 안겼다. 그렇다면 에덴 추방과 황금시대의 상실은, 떠돌며 살던 풍요를 버리고 밭에 묶인 삶으로 넘어온 인류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회한의 기억인지도 모른다. 움직이던 존재가 멈춰 서면서 잃어버린 것에 대한, 종 전체의 향수.

그 향수가 낳은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아틀란티스다. 출처는 단 한 사람 — 철학자 플라톤이다. 그는 두 편의 저작에서, 아득한 옛날 바다 너머에 있었다는 강대하고 풍요로운 섬나라가 오만해져 신의 벌을 받고 하루아침에 바다에 잠겼다고 썼다. 그 이전의 어떤 기록에도 아틀란티스는 없고,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부터가 스승이 지어낸 이야기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이야기의 짜임새도 역사 서술이 아니라 교훈담에 가깝다 — 이상적인 나라도 교만하면 몰락한다는, 플라톤이 평생 매달린 주제의 무대장치인 것이다. 다만 완전한 무에서 나온 상상은 아닐 수 있다. 플라톤보다 천 년쯤 전, 에게해의 산토리니 화산이 폭발해 섬의 절반이 바다에 잠기고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이 큰 타격을 입은 실제 사건이 있었다 — 그 재난의 기억이 흐릿한 전승으로 떠돌다 플라톤의 붓끝에서 이야기의 재료가 되었으리라는 추정은 학계에서도 진지하게 논의된다. 실제 재난이 신화로 빚어지는 과정의 표본인 셈이다.

그리고 이 계보의 20세기 한국판이 환단고기다. 아득한 옛날 광대한 영토와 높은 문화를 지닌 위대한 나라들이 있었는데 그 기록이 사라졌다는 서사 — 잃어버린 황금시대라는 뼈대가 정확히 같다. 학계 다수가 이 책을 20세기의 저작으로 판단하는 근거, 그리고 이에 맞서는 반론은 자료실 「환단고기, 무엇을 말하는가」 시리즈가 양쪽을 대칭으로 상세히 다루므로 여기서 반복하지 않는다. 이 자리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진위가 아니라 자리다. 아틀란티스와 환단고기는 정서와 기능이 같은 자리에 있지만, 문헌으로서는 결정적으로 다른 자리에 있다 — 플라톤은 자기 이름을 걸고 "전해 들은 이야기"라는 액자까지 달아 내놓았고, 스스로 사료임을 주장한 적이 없다. 반면 환단고기는 고대의 실제 기록임을 주장하며 출발하고, 바로 그 주장 때문에 검증의 저울에 오르며, 9편의 도구들 앞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이라고 자처하느냐 — 우화와 위서 논쟁을 가르는 선은 거기에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한 겹이 더 있다. 왜 하필 20세기의 한국에서 이 서사가 만들어지고 그토록 널리 읽혔는가. 나라를 빼앗기고, 역사를 왜곡당하고, 전란 속에 실제로 수많은 기록을 잃은 사람들 — 그들에게 "우리에게도 위대한 과거가 있었으나 기록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간절한 소망의 형태였다. 그 갈망은 실제 역사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 단군을 구심점으로 삼은 신앙이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던 것은 위서 논쟁과 무관하게 사실의 영역이다. 그러니 환단고기를 둘러싼 감정 — 사실이 아니라는 판정 앞에서 느끼는 아쉬움까지도 — 은 조롱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역사의 일부다. 잃어버린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잃어버린 황금시대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헤시오도스의 그리스인이 그랬고, 플라톤의 아테네가 그랬고, 식민지의 조선인이 그랬다.

이제 여정을 접자. 우리는 아프리카를 떠난 발걸음에서 시작해, 신전을 세운 떠돌이들과 풀을 나누다 법을 만든 사람들을 지나, 네 문명에서 반복된 하나의 이야기와 초원을 달린 건국신화의 문법을 보았고, 두 세계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낸 나라들을 지나 베링의 얼음을 건넜으며, 닮음을 가르는 도구를 챙겨 잃어버린 낙원들 앞에 섰다.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하나다. 인간은 움직이는 존재이고, 이야기는 인간이 만든 것 중 가장 멀리 움직이는 것이다. 이야기는 핏줄보다 멀리 가고 제국보다 오래 남는다 — 길가메시의 점토판이 그것을 새긴 제국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듯이.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멈춰 선 지 1만 년이 지나서도 우리가 트인 길과 낯선 땅과 떠나는 이야기에 설레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아직, 움직이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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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움직이는 인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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