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빙하기, 지구의 물이 얼음으로 묶이면서 바닷물의 높이가 지금보다 100미터 넘게 내려간 시절이 있었다. 그러자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사이의 바다 밑바닥이 드러나 두 대륙이 하나의 땅으로 이어졌다 — 베링 육교라 불리는, 한때 폭이 천 킬로미터에 달했던 풀밭의 땅이다. 시베리아의 사냥꾼들은 매머드와 들소를 쫓아 이 땅을 건넜고, 얼음이 녹아 길이 다시 바다가 된 뒤 그 후손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남았다. 건넌 시기를 두고는 학계의 논쟁이 뜨겁다 — 오랫동안 1만 5천 년 전쯤으로 보아왔지만, 미국 뉴멕시코의 호숫가에서 발견된 사람 발자국 화석이 2만 년을 넘긴다는 측정 결과가 나오면서 더 이른 이주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이것이 인류의 대이동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먼 발걸음이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만 건너간 것이 아니다. 이야기도 함께 건너갔다. 시베리아의 여러 민족과 아이누(홋카이도와 사할린의 선주민)에게는 곰을 대하는 독특한 의례가 있다 — 곰을 사냥한 뒤 정중히 사죄하고 잔치를 벌여 그 영혼을 돌려보내는데, 뼈를 함부로 부수지 않고 온전히 모아두면 곰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고 믿었다. 두개골을 나무나 장대에 모셔두는 풍습까지 포함해서, 놀랍도록 비슷한 의례가 태평양 건너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도 있다. 곰이 사람과 혼인하거나 사람의 조상이 된다는 이야기도 양쪽에 나란히 분포한다 — 곰이 사람 여인이 되어 시조를 낳는 웅녀 이야기가, 알고 보면 유라시아 북방에서 아메리카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곰 신앙 벨트의 한 자락에 놓여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짝은 세상의 시작 이야기다. 태초에 온 세상이 물이었는데, 새나 작은 짐승이 물 밑바닥까지 잠수해 진흙 한 줌을 물고 올라왔고, 그 진흙이 불어나 땅이 되었다 — "잠수하는 창조자"라 불리는 이 이야기는 시베리아와 핀란드 일대, 그리고 북아메리카에 폭넓게 퍼져 있다. 세계가 하늘·땅·지하의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층들을 꿰뚫는 큰 나무나 기둥이 있으며,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무당)이 그 축을 타고 오르내리며 병든 이의 영혼을 찾아온다는 상상 — 이른바 샤머니즘의 뼈대도 양쪽이 같다. 서로 만난 지 1만 년이 넘은 두 세계가 같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이 이야기들이 그 이별보다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이야기의 나이가 문자의 나이를 아득히 앞지르는 순간이다.
그런데 닮지 않은 것이 하나 있고, 그것이 오히려 결정적이다. 아메리카에는 유목이 없었다. 초원을 달릴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아메리카의 토종 말은 일찍이 사라졌고, 평원 원주민의 그 유명한 기마 문화는 16세기에 유럽인이 말을 다시 들여온 뒤에야 생겨났다). 그래서 아메리카에는 이 시리즈가 지금까지 따라온 무늬 — 유목과 정착이 부딪히고 흡수하는 이야기 — 가 없다. 대신 그보다 오래된 층, 곰과 잠수하는 새와 세계나무의 층이 고스란히 보존되었다. 말하자면 아메리카는 유목의 시대가 열리기 전 인류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타임캡슐이다. 유라시아에서는 그 위에 유목 서사가 덧칠되었지만, 바다 건너에서는 밑그림이 그대로 남았다.
웅녀와 북미의 곰 어머니가 닮은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 같은 조상들이 갈라지기 전에 이미 품고 있던 이야기의 두 후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성급한 독자는 위험한 지름길로 빠진다. "닮았다, 그러므로 건너갔다"는 논리로 무장하면 세상 모든 유사성이 증거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와 마야 문양이 닮았다는 주장은 어떨까. 어떤 닮음이 혈연이고 어떤 닮음이 우연인지 — 그것을 가르는 도구가 다음 편의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