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는 자와 떠나는 자 — 곡식과 가축이 갈라놓은 두 철학

-3000 · 유라시아 농경지대와 초원의 경계

곡식과 가축의 가장 큰 차이는 맛도 영양도 아니다. 곡식은 쌓이고 가축은 걸어 다닌다는 것이다. 사소해 보이는 이 차이가 두 세계의 생각을 갈라놓았다.

곡식은 창고에 넣으면 겨울을 난다. 잘하면 몇 해도 간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면 반드시 잉여가 생기고, 잉여가 생기면 그것을 지킬 사람과 나눌 규칙과 물려줄 방법이 필요해진다. 지키려면 담을 쌓아야 하고, 담을 쌓으려면 사람을 부려야 하고, 사람을 부리려면 명령할 자리가 있어야 한다. 창고 하나에서 성벽과 관리와 상속과 계급이 줄줄이 딸려 나온다. 반면 가축은 창고에 넣을 수 없다. 스스로 걸어야 하고 풀을 따라가야 하며, 잘못 관리하면 하룻밤 눈보라에 절반이 사라진다. 재산이 제 발로 움직이는 사회에서는 무한정 쌓는 일이 애초에 어렵다. 그리고 계절마다 짐을 싸야 하는 사람은 짐이 무거워지는 것을 싫어하게 된다 — 유목민의 살림살이가 단출하고 대신 장신구가 화려한 데는 이유가 있다. 몸에 걸치는 것은 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땅을 대하는 태도도 갈린다. 농경민은 조상을 땅에 묻는다. 무덤은 슬픔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이 땅이 우리 것이라는 가장 오래된 증서다. 조상이 여기 누워 있으니 여기는 우리 땅이라는 논리는 세계 어디서나 통했다. 유목민은 그럴 수 없다. 봄에 있던 곳에 가을에는 없으므로, 조상을 땅이 아니라 이름과 노래에 남긴다. 앞으로 볼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이 내민 땅과 재물을 마다하고 죽은 뒤에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이름을 택하는 장면은, 그러니까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하는 말이다. 쌓을 수 없는 사람은 남길 것을 다른 데서 찾는다.

권력의 크기도 달라진다. 농부는 도망칠 수 없다. 밭과 창고와 무덤을 두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배자가 무리한 요구를 해도 견디는 쪽을 택하게 되고, 견디는 사람이 많을수록 지배자는 더 요구할 수 있다. 유목민은 다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천막을 걷고 다른 초원으로 간다. 실제로 떠나지 않더라도 떠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배자를 제약한다. 정치학자 제임스 스콧이 초기 국가의 성벽은 적을 막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안의 사람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장치이기도 했다고 말한 것이 이 지점이다. 담은 바깥을 향해서만 서 있지 않았다.

이 순환을 가장 먼저, 그것도 안에서 지켜보며 정리한 사람은 14세기 북아프리카의 이븐 할둔이다. 그는 사막의 부족이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 만큼 강한 유대를 지녔고 그 힘으로 도시를 정복하지만, 도시에 자리 잡고 몇 세대가 지나면 편안함 속에서 그 유대가 풀려 결국 다음 사막 부족에게 무너진다고 보았다. 정복하고, 정착하고, 물러지고, 정복당한다. 초원과 성벽 사이를 오간 수천 년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셈이다.

다만 여기서 흔한 함정 하나를 피해야 한다. 유목민이 더 자유롭고 평등했다는 식의 낭만은 사실이 아니다. 초원에도 노예를 사고파는 시장이 있었고 세습 귀족이 있었으며, 몽골 제국은 인류사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정복과 학살을 저질렀다. 농경 사회에도 마을 공동체의 촘촘한 상호부조가 있었다. 차이는 도덕의 우열이 아니라 구조다 — 무엇으로 먹고사느냐가 무엇을 쌓을 수 있는지를 정하고, 무엇을 쌓을 수 있는지가 누가 누구에게 명령할 수 있는지를 정한다. 사람이 달라서 사회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먹고사는 방식이 다르면 같은 사람도 다른 사회를 만든다.

이 갈라짐을 알고 나면 옛이야기들이 다르게 읽히기 시작한다. 성벽을 자랑하는 왕과 초원을 달리는 야생인, 밭을 가는 형과 양을 치는 동생, 땅을 약속하는 왕중왕과 이름을 원하는 전사 — 이들은 그저 사이가 나빴던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계산법으로 세상을 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그 이야기들을 나란히 펼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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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움직이는 인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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