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홍은 조식의 수제자다. 합천에 살면서 스승의 실천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쉰일곱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켰다. 합천과 성주 일대에서 왜군과 싸웠고, 경상우도 의병의 중심이 됐다. 스승이 가르친 의(義)를 문자 그대로 실행한 셈이다.
전쟁 뒤 북인의 영수가 되어 광해군을 옹립하는 데 앞장섰다. 광해군 대에 좌의정, 우의정을 지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여든여덟의 나이로 처형됐다.
정인홍은 조식의 수제자다. 합천에 살면서 스승의 실천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쉰일곱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켰다. 합천과 성주 일대에서 왜군과 싸웠고, 경상우도 의병의 중심이 됐다. 스승이 가르친 의(義)를 문자 그대로 실행한 셈이다.
전쟁 뒤 북인의 영수가 되어 광해군을 옹립하는 데 앞장섰다. 광해군 대에 좌의정, 우의정을 지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여든여덟의 나이로 처형됐다.
정인홍의 사상은 독립된 체계라기보다 조식 학풍의 정치적 적용이다.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실천 없는 학문에 대한 거부다. 그는 명분만 앞세우고 현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학풍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다른 하나는 스승에 대한 절대적 옹호다.
1611년, 그는 회퇴변척 상소를 올렸다. 문묘에 배향된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하면서 스승 조식이 그들보다 못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다. 조선 사회에서 문묘 배향은 학문적 정통의 최종 인증이었으므로, 이는 정통 자체를 다시 매기자는 요구였다.
파장은 컸다. 성균관 유생들이 반발해 그의 이름을 유적에서 지웠다.
북인 정권의 실질적 기둥이 정인홍이었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와 대동법 시행 같은 정책이 이 정권에서 나왔다.
동시에 그는 정권 유지의 강경 노선에도 관여했다.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폐하는 과정에서 북인 강경파가 주도적 역할을 했고, 이것이 인조반정의 명분이 됐다.
인조반정 뒤 북인은 정치 세력으로서 완전히 소멸했다. 조선 붕당 가운데 재기하지 못한 유일한 경우다. 그와 함께 남명학파도 학문적 계보로서 크게 위축됐다. 스승의 문집이 훼손되고 서원이 철폐됐다.
정인홍은 조선 후기 내내 역적으로 기록됐다. 그가 복권된 것은 1908년에 이르러서다. 285년이 걸렸다.
오늘날 평가는 갈린다. 한쪽은 그를 실천 유학의 화신으로 보고, 문묘 배향에 도전한 일을 학문적 권위주의에 맞선 시도로 읽는다. 다른 쪽은 그가 스승을 높이려는 개인적 동기로 학계 전체를 적으로 돌렸고, 정권 유지를 위해 폐모살제에 관여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분명한 것은 그의 몰락이 개인의 몰락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학파가 정치적으로 패배하자 그 학문 자체가 사라졌다. 조선에서 학문과 정치가 얼마나 붙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다.
학문적 권위는 누가 정하는가. 정인홍은 문묘 배향이라는 국가 공인의 정통 목록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 자체는 정당한 문제제기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문제제기를 정치 권력을 쥔 상태에서 했다. 그래서 학문 논쟁이 아니라 권력 행사로 받아들여졌고, 권력을 잃자 학문까지 함께 무너졌다. 사상을 정치로 관철하려 할 때 치르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그의 생애가 보여준다.
이 글은 조선 사상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