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북인 — 실리외교와 폐모살제 사이

1613 · 한양 창덕궁

임진왜란 중 세자로서 분조를 이끌며 전장을 돌았던 광해군이 1608년 즉위했다. 그를 떠받친 것은 북인, 그중에서도 대북이었다.

광해군의 정책에는 뚜렷한 성취가 있었다. 전쟁으로 무너진 재정을 다시 세우기 위해 대동법을 경기도에 처음 시행했고, 불타버린 실록을 다시 갖추고 동의보감을 간행했다.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완전히 서지 않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명의 파병 요구에 응하되 강홍립에게 상황을 보아 처신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왕권을 지키는 과정은 참혹했다. 광해군은 서자이자 차남이었고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다. 1613년 계축옥사로 이복동생 영창대군이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서 죽었다.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됐다. 이를 폐모살제라 부른다.

1623년 서인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냈다. 명분은 두 가지였다 —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패륜, 그리고 명에 대한 배신.

두 개의 입장

북인 (광해군 지지)

이이첨, 정인홍

전쟁으로 나라가 거덜났다. 명은 이미 기울고 있고 후금은 떠오르고 있다. 이 상황에서 명분만 붙들고 후금과 척을 지면 또 전쟁이다. 조선은 두 번의 전쟁을 감당할 수 없다. 왕실 내부의 처분은 가혹했으나, 정통성이 흔들리는 왕 아래서는 어떤 정책도 추진되지 않는다.

근거 조식 학맥의 실천 중심 학풍. 임진왜란 의병 경험에서 나온 현실 감각.

서인 (반정 주도)

이귀, 김류, 이괄

어머니를 가두고 동생을 죽인 자가 어떻게 나라의 근본인 효를 말할 수 있는가. 유교 국가에서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의 문제다. 또한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한 명을 저버리는 것은 은혜와 신의를 버리는 일이다. 국가 간의 약속을 이익에 따라 뒤집는 나라는 누구에게도 신뢰받지 못한다.

근거 이이·성혼 학맥의 명분론. 재조지은(再造之恩) 의식.

결과

반정은 성공했고 광해군은 폐위되어 제주도에서 죽었다. 북인은 정권에서 완전히 축출되어 이후 정치 세력으로 복원되지 못했다. 조선 붕당 가운데 가장 철저하게 소멸한 경우다.

그리고 14년 뒤, 반정 세력이 집권한 조선은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겪는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나였다면

나였다면 어느 쪽에 섰겠는가.

여기에는 두 개의 질문이 겹쳐 있어 더 어렵다. 첫째, 강대국이 교체되는 국면에서 기존의 동맹을 지킬 것인가 새 강자와의 관계를 열 것인가. 둘째, 좋은 정책을 편 통치자의 심각한 인권 침해를 어떻게 볼 것인가.

광해군을 재평가하는 시각은 20세기 이후 널리 퍼졌지만, 폐모살제를 정통성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정당화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반대로 반정 세력의 명분이 옳았다 해도, 그 결과가 두 차례의 호란이었다는 사실 또한 지워지지 않는다.

오늘의 거울

성과를 낸 지도자의 인권 침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한국 현대사에서도 되풀이된 질문이다. 경제 성장과 정치적 억압을 한 인물 안에서 어떻게 함께 볼 것인가를 두고 사회는 여전히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또 하나.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크게 흔들려 왔다. 조선 후기 내내 패륜의 군주였다가, 근대 이후 실리외교의 선각자로 재조명됐고, 최근에는 다시 그 외교의 실제 내용을 엄밀히 따져보자는 연구가 나온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그 시대가 무엇을 중시하는지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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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붕당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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