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 고치지 않으면 망한다

1582 · 강원도 강릉 · 황해도 해주 석담

생몰
1536~1584
학파
기호학파
연고
강릉 오죽헌 · 파주 · 해주 석담
주요 저술
성학집요, 동호문답, 격몽요결, 만언봉사

이이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신사임당이다. 열세 살에 과거에 합격했고 아홉 차례 장원했다 하여 구도장원공이라 불렸다.

어머니를 열여섯에 잃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한 일이 있다. 1년 남짓 만에 돌아왔지만 이 이력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공격거리가 됐다.

말년에는 해주 석담에 은병정사를 세워 제자를 길렀다. 마흔아홉에 죽었다.

핵심 사상

이황이 이(理)의 능동성을 강조했다면 이이는 다른 길을 갔다. 그는 움직이는 것은 기이고 이는 그 위에 타고 있다고 보았다(기발이승일도설). 이와 기는 나눌 수 없으면서도 섞이지 않는다 — 이것을 이기지묘라 부른다.

이 차이는 관념적으로만 보이지만 실천에서 갈린다. 이황의 체계에서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닦아 이를 드러내는 일이다. 이이의 체계에서는 기가 실제로 움직이는 세계, 곧 현실의 제도와 조건이 중요해진다.

그래서 이이의 학문은 경장(更張)으로 향한다. 거문고 줄을 다시 매듯 낡은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이 이미 중쇠기, 곧 나라의 기운이 꺾이는 시기에 들어섰다고 진단했다.

당대의 역할

그가 내놓은 개혁안은 구체적이었다.

공납의 폐단을 고치기 위해 특산물 대신 쌀로 걷자는 수미법을 주장했다. 이 발상은 훗날 대동법으로 실현된다. 군역의 부담을 줄이는 방안, 서얼의 관직 진출을 허용하자는 주장, 노비 제도의 완화까지 논의했다.

동인과 서인이 갈렸을 때는 조제보합, 곧 양쪽을 아울러야 한다며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양쪽 모두에게 신뢰를 잃고 결국 서인으로 몰렸다. 그가 죽은 뒤 서인은 그를 학문적 종주로 삼았고, 기호학파의 계보가 여기서 시작된다.

십만양병설은 후대 기록에 나오는 것으로, 그 진위와 정확한 내용에 대해서는 학계에 이견이 있다.

논쟁

이이를 개혁가로만 보는 것도, 붕당의 시조로만 보는 것도 한쪽만 본 것이다.

그의 개혁안 다수는 당대에 채택되지 않았다. 기득권의 반대도 있었지만, 그가 중재자를 자처하다 양쪽에서 밀린 정치적 고립도 원인이었다.

한편 그가 죽은 뒤 노론이 그를 정통으로 삼으면서, 이이의 사상은 원래 모습보다 훨씬 경직된 형태로 굳어졌다. 주자 절대주의를 내세운 송시열의 노론이 정작 유연한 사고를 했던 이이를 간판으로 삼은 것은 아이러니다. 사상가는 자기 사후에 무엇으로 쓰일지 정할 수 없다.

오늘 읽기

이이의 진단은 문제가 터지기 전에 고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예방적 개혁이 정치적으로 가장 어렵다. 아직 위기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절박함이 없고, 고치는 비용은 지금 당장 들기 때문이다.

그가 죽고 8년 뒤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의 경고가 옳았다는 것이 최악의 방식으로 증명됐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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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사상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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