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 —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정해진 주인이 있겠는가

1589 10월 · 전라도 전주 · 진안 죽도

생몰
1546~1589
학파
이단으로 몰린 사상
연고
전주(완주 상관면 생가터) · 금구 · 진안 죽도
주요 저술
남은 저술 없음 — 역모로 몰려 소각·산일

정여립은 전주에서 태어났다. 1570년 문과에 급제해 예조좌랑과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그의 이력에서 문제가 된 것은 당적을 옮긴 일이다. 원래 서인이었고 이이의 문인이었는데, 동인으로 옮겨가면서 스승 이이를 비판했다. 선조가 이를 불쾌히 여기자 그는 사직하고 낙향했다.

고향에 돌아온 뒤 그는 대동계를 만들었다. 매달 15일에 모여 활쏘기를 하고 음식을 나누며 강론했다. 1587년 왜구가 침입했을 때 이 대동계가 나서서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1589년 10월, 황해감사의 고변이 올라왔다.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관군이 진안 죽도를 포위했고 그는 그곳에서 죽었다. 선조실록은 자결로 기록했으나 사인은 불분명하다.

핵심 사상

그가 남긴 사상은 두 마디로 전한다. 선조수정실록 22년 10월 1일자에 실려 있다.

첫째, 천하공물설이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정해진 주인이 있겠는가. 그는 요임금과 순임금과 우왕이 서로 임금 자리를 물려준 것을 근거로 들었다. 이들이 성인이 아니냐는 것이다. 왕조와 왕실이 천하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둘째, 하사비군론이다.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그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이 왕촉이 죽을 때 한 일시적인 말이지 성현의 공통된 의견은 아니라고 했다. 유하혜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주목할 것은 그가 주자를 직접 겨눴다는 점이다. 맹자가 제 선왕과 양 혜왕에게 왕도를 권한 것을 두고 주자가 잘못이라 비난했는데, 큰 현인의 견해라는 것도 이렇게 서로 다르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계라는 이름도 우연이 아니다. 대동은 예기 예운편에 나오는 이상사회로, 차별 없는 세상을 뜻한다.

당대의 역할

그의 사상이 조선 체제에 왜 위협이었는지는 명확하다.

조선은 군신 관계를 하늘이 정한 질서로 보는 강상론 위에 서 있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천하에 정해진 주인이 없다면, 그리고 누구를 섬겨도 임금이라면, 조선 왕실이 다스려야 할 근거가 사라진다.

신채호는 일찍이 정여립을 두고 4백 년 전에 군신강상론을 타파하려 한 인물이라 평가했다. 그가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라는 점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대동계 역시 그 사상의 실천이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아 활을 익히게 한 조직이었으니, 천하가 만백성의 것이라는 생각이 형태를 갖춘 셈이다.

논쟁

그가 실제로 모반을 준비했는가는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모반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이런 것들이 제시된다. 그의 집에서 제천문 일곱 장이 압수됐는데, 제천문은 임금이 하늘에 제사 지낼 때만 짓는 글이다. 또 목자(李)는 망하고 전읍(鄭)은 흥한다는 참언을 퍼뜨렸다는 기록이 있다.

반대로 조작이라는 견해도 오래 제기됐다. 대동계는 비밀결사가 아니라 매달 정기적으로 모이는 공개 조직이었다. 또 진안 죽도는 그의 별장이 있던 곳이고 금구는 처가가 있던 곳이라, 도망칠 장소로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실제로 숨을 뜻이 있었다면 그 지형에서 진안현 관군 정도가 쉽게 찾을 수 있었겠느냐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그의 글이 남아 있지 않다. 역모로 몰린 인물의 저술은 소각되거나 흩어졌다. 우리가 아는 그의 사상은 그를 죽인 쪽이 죄목으로 기록한 문장들뿐이다. 그 인용이 정확한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그를 한국사 최초의 공화주의자로 부르는 평가는 신중히 볼 필요가 있다. 남은 두 마디로 그의 사상 전체를 재구성하기에는 근거가 너무 적다. 확실한 것은 그 두 마디만으로도 당시 조선에서 죽을 이유가 됐다는 사실이다.

오늘 읽기

기록이 승자의 것일 때 패자의 생각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정여립의 경우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의 사상이라고 전하는 문장들은 그를 처형하기 위해 죄목으로 정리된 것들이다. 우리는 검사의 공소장을 통해서만 피고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남은 한 문장은 무겁다. 천하는 공물이다. 4백 년 뒤에 읽어도 이 말의 뜻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말을 했다는 이유로 천 명이 죽었다.

출처

관련 콘텐츠

이 글은 조선 사상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지도에서 관련 사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