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 이름을 빼달라는 스물다섯 해

1978 10월 17일 · 도쿄 지요다구 구단

야스쿠니 신사 배전. 신전 앞에 드리운 흰 장막에 국화 문장 네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고, 왼쪽에 경비원 한 사람이 서 있다.
야스쿠니 신사 배전. 참배객이 서는 자리다. 흰 장막의 국화 문장은 천황가의 표식이다.사진 Kakidai ·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 가로 비율에 맞춰 잘라냄

1944년, 이희자가 두 살 때 아버지 이사현이 끌려갔다. 그 뒤로 소식이 없었다.

아버지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알게 된 것은 1989년이다. 마흔다섯 해 만이었다. 1945년 6월 중국 광서성의 한 병원에서 숨졌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함께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아버지가 1959년부터 도쿄의 한 신사에 신으로 모셔져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딸에게 묻지 않았고, 알려주지도 않았다.

천안 망향의 동산에 이희자가 세운 아버지의 비석에는 글자가 없다. 백비다. 유해가 없어서다.

이 편은 야스쿠니 신사가 어떤 곳인지에 관한 것이다. 참배하러 누가 갔다는 뉴스는 해마다 나오지만, 정작 그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신사가 아니라 장치다

야스쿠니는 오래된 신사가 아니다. 1869년에 세워졌으니 백오십 년 조금 넘었고, 처음 이름은 도쿄초혼사였다. 메이지 정부가 자기 편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지은 시설이다.

여기가 핵심이다. 반대편에서 죽은 사람은 들어가지 못했다. 같은 내전에서 같은 땅에서 죽었어도, 새 정부에 맞선 쪽은 이 명단에 없다. 처음부터 국가가 죽음을 골라내는 시설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름이 명단에 오르면 그 사람은 신이 된다. 신사의 설명에 따르면 여러 신이 하나로 합쳐져 모셔지는 것이라서, 한 번 올라간 이름은 다시 빼낼 수 없다. 뒤에 나올 모든 이야기가 이 한 문장에 걸려 있다.

1978년 10월 17일

이 신사가 국제 문제가 된 시점은 분명하다.

1978년 10월 17일, 야스쿠니는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정받은 열네 명을 합사했다. 태평양전쟁을 이끈 도조 히데키가 있고, 조선 총독을 지낸 고이소 구니아키가 있다. 이 일은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나중에야 알려졌다.

주목할 것은 그다음이다. 쇼와 천황이 그 뒤로 야스쿠니에 발을 끊었다. 후대 천황들도 가지 않았다. 합사 이전에는 여러 차례 참배하던 자리였다.

일본 안에서도 이것이 선을 넘은 일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이 편이 하려는 이야기가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미리 말해 둔다.

적이 없는 전쟁 박물관

신사 경내에는 유슈칸이라는 박물관이 있다. 1882년에 문을 열었으니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박물관 축에 든다. 2002년에 49억 엔을 들여 크게 넓혔다.

이 박물관을 오래 연구한 영국 요크대학의 올레크 베네시는 이곳을 이른바 야스쿠니 사관의 상징이라고 정리했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축소해 서술하는 역사관이다.

야스쿠니를 연구한 존 브린은 더 구체적인 특징을 짚었다.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전시품이 거의 전부 일본 것이다. 입구의 제로센 전투기부터 가이텐이라는 인간어뢰까지, 관람객이 보는 물건은 일본이 만들고 일본이 쓴 것들이다. 싸운 상대는 화면에서 지워져 있다. 전쟁이 누가 일으킨 일이 아니라 피할 수 없이 닥친 자연재해처럼 서술된다는 지적도 같은 연구에 나온다.

전시품 중에는 태국과 버마를 잇는 철도에 쓰인 기관차가 있다. 강제노동으로 놓여 죽음의 철도라고 불리는 그 철도다. 기관차는 그냥 서 있다.

이 박물관에 대한 비판은 이웃 나라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2006년 주일 미국대사 토머스 시퍼와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 리처드 아미티지가 이곳의 역사관에 동의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관람을 마치면 기념품 가게가 나온다.

그 안에 우리가 있다

여기까지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이제 우리 이야기다.

일본 정부는 1959년부터 1976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일제에 군인과 군속으로 동원됐다가 숨진 조선인 2만 1천여 명을 야스쿠니에 합사했다.

두 가지를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이것은 신사가 혼자 벌인 일이 아니다. 전몰자 명부를 신사에 넘긴 것은 일본 정부다. 종교시설의 판단이 아니라 국가의 행위였다.

둘째, 유족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사자도 가족도 몰랐다. 일본 정부가 조선인 합사 명부를 한국 정부에 넘긴 것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의 일이다. 그전까지 유족들은 자기 아버지가, 형이, 삼촌이 도쿄에서 신이 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 방법이 없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원치 않는 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죽은 사람들이, 그 전쟁을 일으키고 그들을 끌고 간 자들과 같은 자리에, 같은 이름으로 모셔져 있다. 그리고 빼달라는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름을 빼달라는 스물다섯 해

유족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6월, 재한 군인·군속 유족과 생존 피해자 414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다. 합사 철회만이 아니라 강제동원 배상과 유골 반환까지 묶은, 전후 보상 재판의 총결산이라 불린 소송이었다. 패소했다.

2013년 10월, 유족 27명이 다시 냈다. 1심 판결이 나온 것은 2019년 5월이다. 소를 제기한 지 6년 7개월 만이었고, 기각이었다.

2025년 1월 17일, 일본 최고재판소가 상고를 기각하며 이 소송은 끝났다. 기각 사유가 중요하다. 제척기간이었다.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20년이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이 대목을 한 번 더 읽어야 한다. 합사 명부가 한국에 넘어온 것이 2000년 전후다. 유족들은 그전에는 합사 사실을 알 수조차 없었다. 알 수 없었던 기간까지 세어 20년이 지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 안에도 있다

그 판결에 일본 안에서 이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고재판소의 미우라 마모루 재판관은 유족이 받아들이지 않은 합사 때문에 가까운 이를 조용히 추모할 생활이 방해받을 수 있다며, 유족의 고통에는 법으로 다 헤아리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제척기간을 이유로 청구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일본의 일간지 도쿄신문은 그해 2월 6일 사설에서 이 판결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시간의 벽으로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을 덮어버린 것으로 보인다고 했고, 최고재판소는 헌법 판단에서 도피하지 말고 헌법의 파수꾼 노릇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한 가지 더 있다. 일본 방위성은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육해공 자위대의 부대 단위 야스쿠니 참배를 금지하고 있다. 일본 정부 스스로 이 시설이 국가와 종교를 가르는 선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25년 9월, 희생자의 손주 세대가 3차 소송을 냈다. 그해 12월에는 유족들이 처음으로 한국 법정에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를 세웠다. 한 나라를 다른 나라 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국가면제의 벽에 오래 막혀 있던 일이다. 2026년에는 재일동포 3세가 원고로 참여했다. 소수자로 조용히 살아온 재일동포가 이 소송에 이름을 올린 것은 처음이다.

무엇이 왜곡인가

이 시리즈가 다루는 왜곡은 대개 거짓말의 형태를 띤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거나, 있는 것을 없다고 한다.

야스쿠니와 유슈칸은 조금 다르다. 여기서는 거짓말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유슈칸은 없는 전투를 지어내지 않는다. 다만 상대를 치우고, 죽은 사람의 수를 세지 않고, 왜 그 전쟁이 시작됐는지를 흐린다. 고르는 것도 왜곡이다.

야스쿠니는 없는 이름을 지어내지 않았다. 다만 있는 이름을 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름을 왜 못 빼느냐고 물으면 종교의 자유라고 답한다.

가끔 독일과 비교하는 이야기가 돈다. 독일은 전범의 유골을 강에 뿌렸다는 식이다. 사실관계를 짚어두자. 1946년 10월 뉘른베르크에서 처형된 자들을 화장해 이자르강 지류에 뿌린 것은 독일이 아니라 연합군이었고, 그 한 번뿐이었다. 독일의 관행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한 이유는 분명했고, 그 이유가 이 글의 자리와 정확히 맞닿는다. 유해를 남기면 무덤이 생기고, 무덤이 생기면 참배지가 되고, 참배지가 생기면 추종자가 모인다. 그것을 막으려고 뿌린 곳조차 밝히지 않았다.

한쪽은 참배할 자리가 생기는 것을 막으려 했고, 한쪽은 그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 사람 2만 1천 명이 함께 들어가 있다.

이 편을 일본어로 옮겨 아래에 붙인다. 일본에서 이 글을 찾아 읽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은 안다. 그래도 옮겨 둔다. 기록은 읽힐 때를 골라서 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日本語版

아래는 위 본문의 일본어 번역이다. 일본에서 이 글을 찾아 읽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옮겨 두는 것은, 언젠가 누군가 인용하거나 옮겨 나를 때 원문이 여기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944年、李熙子(イ・ヒジャ)が二歳のとき、父・李思鉉(イ・サヒョン)が連れて行かれた。それきり消息は途絶えた。

父がいつどこで亡くなったのかを知ったのは1989年である。四十五年後だった。1945年6月、中国・広西省の病院で息を引き取ったという。しかしそのとき、もう一つの事実を同時に知らされた。父が1959年から東京のある神社に神として祀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だった。娘に尋ねた者はおらず、知らせた者もいなかった。

天安(チョナン)の望郷の丘に李熙子が建てた父の碑には、文字がない。白碑である。遺骨がないからだ。

この文章は、靖国神社がどのような場所なのかについてのものである。誰が参拝したという報道は毎年出るが、その内側がどうなっているのかは、あまり知られていない。

神社というより装置である

靖国は古い神社ではない。1869年に創建されたので百五十年あまりであり、当初の名は東京招魂社だった。明治政府が自らの側で死んだ者たちのために建てた施設である。

ここが要点である。反対の側で死んだ者は入れなかった。同じ内戦で、同じ土地で死んでも、新政府に抗った側はこの名簿にない。初めから国家が死を選別する施設だったということだ。

そして名簿に名が載れば、その人は神になる。神社の説明によれば、複数の神が一つに合わせて祀られるため、一度載った名を再び抜く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これから述べるすべてが、この一文にかかっている。

1978年10月17日

この神社が国際問題となった時点ははっきりしている。

1978年10月17日、靖国は東京裁判でA級戦犯とされた十四人を合祀した。太平洋戦争を主導した東條英機がおり、朝鮮総督を務めた小磯國昭がいる。この合祀は秘密裏に行われ、後になって知られた。

注目すべきはその後である。昭和天皇はそれ以降、靖国に足を運ばなくなった。その後の天皇も参拝していない。合祀以前には幾度も参拝していた場所である。

日本の内側でも、これは一線を越えた事柄として受け止められたということだ。この文章が向き合っているのは日本という国そのも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をここで先に述べておく。

敵のいない戦争博物館

境内には遊就館という博物館がある。1882年に開館したので、日本で最も古い西洋式博物館の一つに数えられる。2002年には49億円をかけて大きく拡張された。

この博物館を長く研究した英国ヨーク大学のオレグ・ベネシュは、ここをいわゆる靖国史観の象徴だと整理している。日本の軍国主義と帝国主義を縮小して叙述する歴史観である。

靖国を研究したジョン・ブリーンは、より具体的な特徴を指摘した。敵がい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展示品がほぼすべて日本のものだ。入口の零戦から回天という人間魚雷まで、来館者が目にする物は日本が造り日本が使ったものである。戦った相手は画面から消されている。戦争が誰かが起こしたことではなく、避けようもなく訪れた自然災害のように叙述されているという指摘も、同じ研究にある。

展示品の中には、タイとビルマを結ぶ鉄道で使われた機関車がある。強制労働によって敷かれ、死の鉄道と呼ばれるあの鉄道である。機関車はただ置かれている。

この博物館への批判は近隣諸国からだけ出たものではない。2006年、駐日米国大使トーマス・シーファーと元米国務副長官リチャード・アーミテージが、ここの歴史観には同意できないと公に述べている。

観覧を終えると、土産物店がある。

その中に私たちがいる

ここまでは比較的知られた話である。ここからが私たちの話だ。

日本政府は1959年から1976年まで六回にわたり、日本の戦争に軍人・軍属として動員されて亡くなった朝鮮人二万一千余人を靖国に合祀した。

二つに分けて見る必要がある。

第一に、これは神社が単独で行ったことではない。戦没者名簿を神社に渡したのは日本政府である。宗教施設の判断ではなく、国家の行為だった。

第二に、遺族には何も告げなかった。本人も家族も知らなかった。日本政府が朝鮮人合祀名簿を韓国政府に引き渡したのは1990年代後半から2000年代初めのことである。それまで遺族には、自分の父が、兄が、叔父が、東京で神になっているという事実そのものを知る術がなかった。

整理すればこうなる。望まぬ戦争に強制的に連れて行かれて死んだ人々が、その戦争を起こし彼らを連れて行った者たちと同じ場所に、同じ名で祀られている。そして、外してほしいという求めは受け入れられていない。

名を外してほしいという二十五年

遺族が黙っていたわけではない。

2001年6月、在韓軍人・軍属の遺族と生存被害者414人が日本政府を相手に訴訟を起こした。合祀の取消しだけでなく、強制動員の賠償や遺骨の返還までを束ねた、戦後補償裁判の総決算と呼ばれた訴訟である。敗訴した。

2013年10月、遺族27人が再び提訴した。一審判決が出たのは2019年5月である。提訴から6年7か月後であり、請求棄却だった。

2025年1月17日、日本の最高裁判所が上告を棄却し、この訴訟は終わった。棄却の理由が重要である。除斥期間だった。損害賠償を請求できる二十年がすでに過ぎている、という判断である。

この箇所はもう一度読む必要がある。合祀名簿が韓国に渡ったのは2000年前後である。遺族はそれ以前には合祀の事実を知ることすらできなかった。知りようがなかった期間まで数えて、二十年が過ぎたと判断したのである。

日本の内側にもある

その判決に、日本の内側から異論がなかったわけではない。

最高裁の三浦守裁判官は、遺族が受け入れていない合祀によって、近しい者を静かに追悼する平穏な生活が妨げられうるとし、遺族の苦痛には法では汲み尽くせない部分があると記した。それでも除斥期間を理由に請求は認めなかった。

日本の日刊紙・東京新聞は同年2月6日の社説で、この判決を正面から批判した。時間の壁によって違憲性の判断を覆い隠したように見えるとし、最高裁は憲法判断から逃げず、憲法の番人としての役割を果たすべきだと述べている。

もう一つある。日本の防衛省は、政教分離の原則に基づき、陸海空自衛隊の部隊単位での靖国参拝を禁じている。日本政府自身が、この施設が国家と宗教を分ける線の上に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ということだ。

争いはまだ終わっていない。2025年9月、犠牲者の孫の世代が三次訴訟を起こした。同年12月には、遺族が初めて韓国の法廷に日本政府と靖国神社を立たせた。一国を他国の法廷に立たせる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主権免除の壁に、長く阻まれてきたことである。2026年には在日コリアン三世が原告として加わった。少数者として静かに暮らしてきた在日コリアンがこの訴訟に名を連ねたのは、これが初めてである。

何が歪曲なのか

この連載が扱う歴史歪曲は、たいてい嘘の形をとる。ないものをあると言い、あるものをないと言う。

靖国と遊就館は少し違う。ここでは嘘があまり出てこない。

遊就館はありもしない戦闘を作り出しはしない。ただ、相手を片づけ、死んだ人の数を数えず、なぜその戦争が始まったのかを曖昧にする。選ぶこともまた歪曲である。

靖国はありもしない名を作り出しはしなかった。ただ、ある名を外さない。そしてなぜ外せないのかと問えば、信教の自由だと答える。

ときおりドイツと比べる話が出回る。ドイツは戦犯の遺骨を川に流したという類の話である。事実関係を確認しておく。1946年10月、ニュルンベルクで処刑された者たちを火葬しイザール川の支流に撒いたのはドイツではなく連合国であり、それは一度きりだった。ドイツの慣行ではない。

ただし、そうした理由ははっきりしており、その理由はこの文章の位置と正確に重なる。遺骨を残せば墓ができ、墓ができれば参拝地になり、参拝地ができれば信奉者が集まる。それを防ぐために、撒いた場所すら明かさなかった。

一方は参拝する場が生まれることを防ごうとし、一方はその場を作った。そしてその場に、私たちの二万一千人が共に入れられている。

この文章は韓国語で書き、日本語に訳してここに置いた。日本でこれを探して読む人が多くないことは分かっている。それでも訳して置く。記録は、読まれる時を選んで残るものではないからだ。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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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왜곡에 맞서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