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이희자가 두 살 때 아버지 이사현이 끌려갔다. 그 뒤로 소식이 없었다.
아버지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알게 된 것은 1989년이다. 마흔다섯 해 만이었다. 1945년 6월 중국 광서성의 한 병원에서 숨졌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함께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아버지가 1959년부터 도쿄의 한 신사에 신으로 모셔져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딸에게 묻지 않았고, 알려주지도 않았다.
천안 망향의 동산에 이희자가 세운 아버지의 비석에는 글자가 없다. 백비다. 유해가 없어서다.
이 편은 야스쿠니 신사가 어떤 곳인지에 관한 것이다. 참배하러 누가 갔다는 뉴스는 해마다 나오지만, 정작 그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신사가 아니라 장치다
야스쿠니는 오래된 신사가 아니다. 1869년에 세워졌으니 백오십 년 조금 넘었고, 처음 이름은 도쿄초혼사였다. 메이지 정부가 자기 편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지은 시설이다.
여기가 핵심이다. 반대편에서 죽은 사람은 들어가지 못했다. 같은 내전에서 같은 땅에서 죽었어도, 새 정부에 맞선 쪽은 이 명단에 없다. 처음부터 국가가 죽음을 골라내는 시설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름이 명단에 오르면 그 사람은 신이 된다. 신사의 설명에 따르면 여러 신이 하나로 합쳐져 모셔지는 것이라서, 한 번 올라간 이름은 다시 빼낼 수 없다. 뒤에 나올 모든 이야기가 이 한 문장에 걸려 있다.
1978년 10월 17일
이 신사가 국제 문제가 된 시점은 분명하다.
1978년 10월 17일, 야스쿠니는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정받은 열네 명을 합사했다. 태평양전쟁을 이끈 도조 히데키가 있고, 조선 총독을 지낸 고이소 구니아키가 있다. 이 일은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나중에야 알려졌다.
주목할 것은 그다음이다. 쇼와 천황이 그 뒤로 야스쿠니에 발을 끊었다. 후대 천황들도 가지 않았다. 합사 이전에는 여러 차례 참배하던 자리였다.
일본 안에서도 이것이 선을 넘은 일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이 편이 하려는 이야기가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미리 말해 둔다.
적이 없는 전쟁 박물관
신사 경내에는 유슈칸이라는 박물관이 있다. 1882년에 문을 열었으니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박물관 축에 든다. 2002년에 49억 엔을 들여 크게 넓혔다.
이 박물관을 오래 연구한 영국 요크대학의 올레크 베네시는 이곳을 이른바 야스쿠니 사관의 상징이라고 정리했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축소해 서술하는 역사관이다.
야스쿠니를 연구한 존 브린은 더 구체적인 특징을 짚었다.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전시품이 거의 전부 일본 것이다. 입구의 제로센 전투기부터 가이텐이라는 인간어뢰까지, 관람객이 보는 물건은 일본이 만들고 일본이 쓴 것들이다. 싸운 상대는 화면에서 지워져 있다. 전쟁이 누가 일으킨 일이 아니라 피할 수 없이 닥친 자연재해처럼 서술된다는 지적도 같은 연구에 나온다.
전시품 중에는 태국과 버마를 잇는 철도에 쓰인 기관차가 있다. 강제노동으로 놓여 죽음의 철도라고 불리는 그 철도다. 기관차는 그냥 서 있다.
이 박물관에 대한 비판은 이웃 나라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2006년 주일 미국대사 토머스 시퍼와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 리처드 아미티지가 이곳의 역사관에 동의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관람을 마치면 기념품 가게가 나온다.
그 안에 우리가 있다
여기까지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이제 우리 이야기다.
일본 정부는 1959년부터 1976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일제에 군인과 군속으로 동원됐다가 숨진 조선인 2만 1천여 명을 야스쿠니에 합사했다.
두 가지를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이것은 신사가 혼자 벌인 일이 아니다. 전몰자 명부를 신사에 넘긴 것은 일본 정부다. 종교시설의 판단이 아니라 국가의 행위였다.
둘째, 유족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사자도 가족도 몰랐다. 일본 정부가 조선인 합사 명부를 한국 정부에 넘긴 것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의 일이다. 그전까지 유족들은 자기 아버지가, 형이, 삼촌이 도쿄에서 신이 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 방법이 없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원치 않는 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죽은 사람들이, 그 전쟁을 일으키고 그들을 끌고 간 자들과 같은 자리에, 같은 이름으로 모셔져 있다. 그리고 빼달라는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름을 빼달라는 스물다섯 해
유족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6월, 재한 군인·군속 유족과 생존 피해자 414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다. 합사 철회만이 아니라 강제동원 배상과 유골 반환까지 묶은, 전후 보상 재판의 총결산이라 불린 소송이었다. 패소했다.
2013년 10월, 유족 27명이 다시 냈다. 1심 판결이 나온 것은 2019년 5월이다. 소를 제기한 지 6년 7개월 만이었고, 기각이었다.
2025년 1월 17일, 일본 최고재판소가 상고를 기각하며 이 소송은 끝났다. 기각 사유가 중요하다. 제척기간이었다.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20년이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이 대목을 한 번 더 읽어야 한다. 합사 명부가 한국에 넘어온 것이 2000년 전후다. 유족들은 그전에는 합사 사실을 알 수조차 없었다. 알 수 없었던 기간까지 세어 20년이 지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 안에도 있다
그 판결에 일본 안에서 이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고재판소의 미우라 마모루 재판관은 유족이 받아들이지 않은 합사 때문에 가까운 이를 조용히 추모할 생활이 방해받을 수 있다며, 유족의 고통에는 법으로 다 헤아리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제척기간을 이유로 청구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일본의 일간지 도쿄신문은 그해 2월 6일 사설에서 이 판결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시간의 벽으로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을 덮어버린 것으로 보인다고 했고, 최고재판소는 헌법 판단에서 도피하지 말고 헌법의 파수꾼 노릇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한 가지 더 있다. 일본 방위성은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육해공 자위대의 부대 단위 야스쿠니 참배를 금지하고 있다. 일본 정부 스스로 이 시설이 국가와 종교를 가르는 선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25년 9월, 희생자의 손주 세대가 3차 소송을 냈다. 그해 12월에는 유족들이 처음으로 한국 법정에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를 세웠다. 한 나라를 다른 나라 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국가면제의 벽에 오래 막혀 있던 일이다. 2026년에는 재일동포 3세가 원고로 참여했다. 소수자로 조용히 살아온 재일동포가 이 소송에 이름을 올린 것은 처음이다.
무엇이 왜곡인가
이 시리즈가 다루는 왜곡은 대개 거짓말의 형태를 띤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거나, 있는 것을 없다고 한다.
야스쿠니와 유슈칸은 조금 다르다. 여기서는 거짓말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유슈칸은 없는 전투를 지어내지 않는다. 다만 상대를 치우고, 죽은 사람의 수를 세지 않고, 왜 그 전쟁이 시작됐는지를 흐린다. 고르는 것도 왜곡이다.
야스쿠니는 없는 이름을 지어내지 않았다. 다만 있는 이름을 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름을 왜 못 빼느냐고 물으면 종교의 자유라고 답한다.
가끔 독일과 비교하는 이야기가 돈다. 독일은 전범의 유골을 강에 뿌렸다는 식이다. 사실관계를 짚어두자. 1946년 10월 뉘른베르크에서 처형된 자들을 화장해 이자르강 지류에 뿌린 것은 독일이 아니라 연합군이었고, 그 한 번뿐이었다. 독일의 관행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한 이유는 분명했고, 그 이유가 이 글의 자리와 정확히 맞닿는다. 유해를 남기면 무덤이 생기고, 무덤이 생기면 참배지가 되고, 참배지가 생기면 추종자가 모인다. 그것을 막으려고 뿌린 곳조차 밝히지 않았다.
한쪽은 참배할 자리가 생기는 것을 막으려 했고, 한쪽은 그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 사람 2만 1천 명이 함께 들어가 있다.
이 편을 일본어로 옮겨 아래에 붙인다. 일본에서 이 글을 찾아 읽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은 안다. 그래도 옮겨 둔다. 기록은 읽힐 때를 골라서 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