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 〈암살자(들)〉이 개봉한 2026년 9월 23일 직후, 9월 29일까지 확인된 기록으로 썼다. 새 기록이나 새 증언이 나오면 고쳐 쓴다.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것은 하나다. 그래서 진짜로는 어떻게 된 일이냐는 것이다. 이 글은 그 물음에 답하려고 쓴다. 영화를 두둔하려는 글도, 영화를 비난하는 쪽을 두둔하려는 글도 아니다. 이 사건을 두고 지금 오가는 말을 세 칸으로 나눠 놓는다. 모두가 인정하는 기록, 틀린 것으로 확인된 주장, 그리고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이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적는다.
1974년 8월 15일 아침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경일 행사라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생중계되던 중이었다.
대통령 박정희가 경축사를 읽던 오전 10시 20분 무렵, 객석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재일교포 2세 청년 문세광이 품에서 권총을 꺼내다 잘못 당겨 자기 허벅지를 쏜 소리였다. 그는 통로로 뛰어나오며 연단을 향해 총을 쏘았다. 박정희는 연설대 뒤로 몸을 숨겼다. 연단 오른쪽에 앉아 있던 영부인 육영수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고, 그날 저녁 숨졌다.
숨진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기념식 합창단으로 나온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다. 그는 문세광이 아니라 범인을 향해 쏜 경호원의 총탄에 맞아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을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빠지는 이름이라 여기 먼저 적어 둔다.
문세광은 객석의 한 관객이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현장에서 붙잡혔다.
수사가 내린 결론
특별수사본부의 발표는 이렇다. 문세광은 북한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곧 조총련의 지령을 받고 박정희를 노렸으나 실패했고, 그가 쏜 총탄에 육영수가 맞았다. 권총은 그해 여름 오사카의 한 파출소에서 훔친 것이었고,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숨겨 김포공항을 통과했다.
문세광은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그해 12월 20일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됐다. 사건에서 처형까지 넉 달이 걸리지 않았다.
한 가지 짚어 둘 것이 있다. 일본 경찰도 문세광의 일본 안 행적과 권총 절취, 여권을 얻은 과정을 따로 조사했는데, 누가 뒤에 있었느냐는 판단에서 두 나라가 같은 결론에 이르지 않았다. 이 차이는 당시 한일 관계를 크게 흔들었고, 일본 정부가 특사를 보내는 데까지 갔다. 공식 결론은 한국 수사본부의 것이지만, 그 결론이 처음부터 두 나라가 함께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영화는 무엇을 했나
〈암살자(들)〉은 허진호 감독의 극영화다. 문세광을 본뜬 인물의 이름은 문태광이다. 이름부터 바꾼 것은 이 영화가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기록 위에 이야기를 지었다는 표시다.
영화에서는 형사와 기자가 행방을 알 수 없는 총탄 두 발을 쫓고, 중앙정보부가 그 앞을 막아선다. 극 중 인물들이 정권이나 정보기관이 사건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입에 올린다. 그러나 영화는 또 다른 저격수가 있었는지, 배후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채 끝난다.
제작진은 영화 어디에서도 특정 인물을 배후로 규정하지 않았고, 영화 속 가설을 사실로 내세우지 않았다고 밝혔다. 반대로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역사 왜곡이라며 사과와 상영 중단을 요구했고, 9월 29일에는 감독과 제작진이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발됐다. 제목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뜻하는 「암살자(들)」인 것부터가 다른 범인을 암시한다는 이유였다.
틀린 것으로 확인된 주장 — 김정일이 사과했다
논쟁이 커진 것은 9월 28일이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영화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썼다. 2002년 박근혜가 방북했을 때 김정일이 육영수 여사 사건에 대해 직접 사과했다, 김정일은 암살 음모는 하급자들이 한 일이고 자신은 미리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북한이 이미 자기 소행이라고 인정한 사건인데 무슨 다른 배후가 있느냐는 논리다.
기록을 따라가 보면 이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2002년 5월 박근혜 당시 의원은 북한의 초청으로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만났다. 돌아와 5월 14일 기자회견을 열었고, 김정일이 사과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 사과의 대상은 1968년 1·21 사태, 곧 김신조 일행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사건이었다. 그는 뒤에 자서전에서도 김정일이 그 일을 두고 극단주의자들이 잘못 저질렀다며 미안하다고 했다고 적었다. 박근혜 자신이 여러 번 이 사과를 이야기했지만, 늘 1968년의 일이었고 1974년의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육영수 사건에 대한 사과 이야기는 어디서 나왔나. 일본 지지통신이 2002년 9월 13일에 낸 기사다. 이 기사는 베이징의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일이 당신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고, 음모에는 하급자들이 관련됐으며 자신은 몰랐다고 했다고 전했다. 장동혁 대표가 쓴 문장과 거의 같다. 그런데 같은 기사에 박근혜 측이 이 내용을 부인했다는 사실도 적혀 있었다. 그 뒤로 북한이 이 사건을 두고 사과한 기록은 나오지 않았고, 박근혜에게서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정리하면, 김정일이 육영수 사건을 사과했다는 것은 당사자가 부인한 외신 보도 하나에 기댄 말이다.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고, 확인된 기록은 오히려 그 반대를 가리킨다.
여기서 한 가지를 함께 적어야 공정하다. 북한이 사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북한이 이 사건과 무관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사과가 있었다는 말이 틀렸다는 것과, 수사본부의 결론이 틀렸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다. 앞의 것은 이 글에서 확인했고, 뒤의 것은 이 글이 판단할 수 있는 범위 밖이다.
확인되지 않은 가설 — 정권이 배후였다
반대편의 이야기도 같은 잣대로 본다.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은 영화가 처음 만든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여러 사람이 물음을 던져 왔다. 대표적인 것이 1989년의 증언이다. 당시 수사본부에서 현장 감식을 맡았던 경찰 감식계장 이건우가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육영수를 쏜 사람은 문세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밖에도 탄두를 끝내 찾지 못했다는 점, 육영수가 쓰러진 방향, 문세광이 어떻게 비표도 없이 식장에 들어왔느냐는 점, 경호실장 박종규의 당시 행동 같은 것이 되풀이해 거론된다.
이 물음들은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러나 물음이 있다는 것과 답이 나왔다는 것은 다르다. 지금까지 정권이나 정보기관이 이 사건을 꾸몄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서나 물증, 관련자의 자백은 나온 적이 없다. 그러니 정권 배후설은 반박된 주장이 아니라 증거가 없는 가설이다. 극영화가 가설을 이야기의 재료로 쓰는 것과, 관객이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이 정권이 꾸민 일이었다고 믿게 됐다면, 그것은 기록이 말하지 않는 것을 기록처럼 믿게 된 것이다.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 — 총성과 총탄
영화가 파고든 두 발의 행방은 실제로 논쟁이 이어지는 자리다. 양쪽의 설명을 나란히 놓는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외교사료관에 남은 수사 기록을 근거로 이렇게 설명한다. 현장에서 여섯 번의 총성이 난 것은 맞다. 문세광은 총알 다섯 발을 넣었다. 첫 발은 긴장한 탓에 자기 허벅지에, 둘째는 연설대 왼쪽 위에 맞았고, 셋째는 불발, 넷째가 육영수를 맞혔으며, 다섯째는 문세광이 넘어지면서 나가 태극기에 맞았다. 나머지 한 번의 총성은 단상의 경호원이 객석 쪽으로 쏜 것이다. 그러니 총성 수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실이 감춰졌다고 보는 것은 수사 기록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혹을 제기하는 쪽은 그 기록 자체가 당시 수사기관이 만든 것이라는 점, 탄두 일부를 찾지 못했다는 점, 감식 담당자의 뒷날 증언을 든다.
아틀라스는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수사 기록은 지금 남은 가장 자세한 기록이다. 다만 그 기록을 만든 쪽과 의심받는 쪽이 같은 정부라는 점 때문에, 독립적인 검증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사실로 남아 있다. 새 기록이 공개되면 이 칸을 고쳐 쓴다.
무엇이 왜곡인가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사실이 이미 정리된 일을 뒤집으려는 주장을 다뤘다. 이번 편은 조금 다르다. 한쪽 끝에는 확인된 사실이, 다른 쪽 끝에는 확인되지 않은 가설이 있고, 그 사이에 어느 쪽도 증명하지 못한 질문이 놓여 있다.
그 안에서 분명하게 왜곡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김정일 사과설이다. 사과 대상을 1968년에서 1974년으로 옮기고, 당사자가 부인한 외신 보도를 확정된 사실처럼 썼다. 그리고 그것을 이미 결론이 난 사건이라는 근거로 삼았다.
정권 배후설은 왜곡이라기보다 증거가 없는 가설이다. 다만 극영화의 가설이 사실처럼 퍼지는 순간 그것 역시 왜곡이 된다. 그 선을 지키는 몫은 만든 사람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있다.
그리고 어느 쪽 주장에도 잘 등장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날 국립극장에서 숨진 사람은 둘이었다. 영부인과 합창단의 여고생이다. 누가 배후였느냐를 두고 다투는 동안에도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