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의 안중근 — 두 프레임이 만나는 자리

1894 10월 · 황해도 신천 청계동

주장

출처도 노림수도 다른 두 개의 왜곡이 한 지점에서 만난다. 하나는 하얼빈 의거를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개인의 살인으로 격하하려는 안중근 테러리스트론이고, 다른 하나는 동학농민운동을 근대화를 방해한 폭도의 난동으로 낮추려는 동학 폭도론이다. 두 프레임이 나란히 붙잡는 사실이 1894년의 안중근이다. 열여섯 살의 그가 아버지 안태훈이 꾸린 민병의 선봉에 서서 동학군과 싸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갈래의 되묻기가 나온다. 영웅이 폭도라 불렀으니 동학은 폭도였다는 쪽과, 동학군을 친 사람이 무슨 영웅이냐는 쪽이다. 이 사실이 저쪽에서 즐겨 쓰이는 이유는 그것으로 무엇을 증명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쪽이 그 사실을 불편해하며 감추려 들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반박

먼저 사실 확인부터 한다. 1894년 가을 황해도 신천 청계동에서 안태훈이 산포수를 모아 민병을 조직했고, 그해 열여섯이던 아들 안중근이 그 선봉에 섰다. 이 일은 누가 찾아낸 약점이 아니라 안중근 자신이 옥중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스스로 적어 남긴 것이다. 감출 것이 애초에 없다.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 부르는 쪽부터 보자. 이 주장을 무너뜨리는 가장 강한 자료는 우리 쪽의 변호가 아니라 그 자신의 행적이다. 그는 뤼순 법정에서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규정하고, 독립전쟁 중에 적장을 사살했으니 형사 피고인이 아니라 만국공법이 정한 포로로 다뤄 달라고 요구했다. 개인의 원한으로 사람을 쏜 자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요구다. 말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1908년 국내진공작전에서 그는 붙잡은 일본군 포로를 만국공법을 근거로 풀어 주었다. 부하들이 강하게 반대했고, 실제로 그 일이 부대 위치를 노출시켜 패퇴의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손해를 보면서도 전쟁의 법을 지킨 사람에게 사인의 살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가 목숨을 걸고 세우려 한 규정 자체를 지우는 일이다.

동학 쪽은 다른 방식으로 답해야 한다. 여기서 흔히 쓰는 변명이 하나 있다. 어린 날의 판단이었을 뿐 나중에는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사실이 아니다. 순국을 앞두고 뤼순 감옥에서 쓴 『안응칠 역사』에서도 그는 동학군을 도적 무리로 적었다. 열여섯의 판단은 서른한 살까지 그대로 갔다. 이 점을 감추면 이 글은 첫 반박에 무너진다.

그래서 물음을 바꿔야 한다. 그가 성장했느냐가 아니라, 한 사람의 판단이 그 자체로 옳음을 보증하느냐다. 1894년의 그는 황해도 청계동의 유교 지주 집안 아들이었고, 그가 본 것은 지휘 계통이 닿지 않는 무리의 약탈이었다. 전봉준이 이끈 호남의 농민군과 달리 황해도의 봉기는 조직이 성글었고 그 지역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그가 본 것은 거짓이 아니다. 다만 한 지역에서 본 것으로 운동 전체를 재는 자리에 그는 끝까지 서 있었다. 안중근은 위대했고, 동시에 이 문제에서는 자기가 선 자리에 갇혀 있었다. 두 가지가 함께 참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이 어디에서 빗나갔는지는 사람 하나로 말할 수 있다. 1894년 남접의 전봉준과 나란히 북접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하한 사람이 손병희다. 그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었고, 이듬해 한일병합을 청원하게 되는 일진회의 이용구와 그 세력을 교단에서 내쫓았다. 1919년 독립선언서 첫머리에 이름을 올린 사람도 그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열다섯이 천도교 사람이었고, 선언서를 찍어 전국에 뿌린 조직력도 거기서 나왔다. 1894년 안중근이 총을 겨눈 그 진영을 지휘하던 사람이, 스물다섯 해 뒤 그가 하려던 일의 맨 앞에 섰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남는다. 1894년 11월 해주성을 쳤다가 패하고, 구월산에서 다시 밀려 떠돌던 열아홉 살 접주 김창수, 훗날의 김구가 이듬해 2월 몸을 의탁한 곳이 청계동이었다. 토벌군을 이끌던 안태훈이 그를 받아들였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청계동에서 보낸 그 시간을 적었고, 안태훈이 신천에 모셔 와 후학을 가르치게 한 고능선을 그 집에서 만나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다. 뒷날 안중근의 조카 안미생은 김구의 맏아들 김인과 혼인해 두 집안은 사돈이 되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 한 밥상에 앉는 이 장면이, 역사가 선악의 편 가르기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논증보다 잘 보여준다.

안중근이 동학군과 싸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가 덜 위대해지지 않는다. 동학이 위대했다고 해서 모든 농민군이 의로웠던 것도 아니다. 흠 없는 위인을 지키려고 사실 하나를 감추는 순간, 우리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위인 전체를 무너뜨리려는 쪽에 가장 좋은 무기를 넘겨주게 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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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왜곡에 맞서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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