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 제국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부 상대편이 남긴 것이다. 중국 왕조의 사서가 그들을 기록했고, 그래서 우리는 늘 정주 사회의 붓으로 초원을 본다.
예외가 있다. 돌궐은 자기 문자를 만들어 초원에 비석을 세웠다. 8세기 오르혼 강가에 세워진 비문에는 이런 취지의 경고가 새겨져 있다 — 중국의 비단은 부드럽고 그 말은 달콤하지만, 그 부드러움과 달콤함에 이끌려 남쪽으로 내려간 우리 백성이 죽었다. 가까이 가지 말고 초원에 머물러라.
이것은 단순한 적개심이 아니라 정치적 분석이다. 정주 사회의 물자와 관직에 개별 부족장들이 포섭되면 초원의 통합이 깨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중원 왕조가 즐겨 쓴 전략이 그것이었다.
돌궐은 또한 유라시아 외교의 한 축으로 움직였다. 비단길 전체를 쥔 뒤 사산조 페르시아를 건너뛰어 동로마와 직접 교섭했고, 양쪽에서 사절이 오갔다. 페르시아 편의 576년 시점에서 같은 구도를 반대편에서 볼 수 있다.
위구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초원에 성곽 도시를 세우고 서방에서 온 마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유목민이 도시를 짓고 외래 종교를 국교로 삼은 것이다 — 초원을 야만으로 보는 시각이 얼마나 게으른지 보여주는 사례다.
한쪽이 남긴 기록만으로 상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기록할 수단을 갖는다는 것은 한 집단에게 무엇을 의미할까?